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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2월 7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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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그 전후 집권세력 내부에서는 미국의 ‘뉴딜을 보라’는 엇박자 노랫가락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아마 당시에는 성장과 분배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뉴딜의 추억’이 삼삼했음 직도 하다. 지금은 타이타닉에서 뛰어내리느라 바빠 그때 그 사람들이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뉴딜의 추억을 떠올려야 할 시점은 오히려 지금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첫 임기 마지막 해였던 1936년. 대공황 극복을 위해 ‘국민의 이름’으로 추진된 뉴딜 개혁이 연방대법원이 내세운 ‘법의 이름’으로 잇따라 좌초되고 있었다. 뉴딜정책의 핵심 집행기관인 ‘국가재건청’마저도 이미 그 전해 5월의 한정위헌 판결로 말미암아 사실상 와해된 상태였다.
정치적 파산 위기에 직면한 대통령이 사법권력 견제와 연방정부 강화를 위한 개헌에 집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돌아보면 재임 중 이미 두 차례의 개헌을 성사시킨 경험도 있었다. 무엇보다 1936년 11월 총선과 대선에서의 승리를 통해 확인된 민심은 압도적으로 대통령 편이었다.
개헌보다 개혁 선택한 루스벨트
그러나 1937년 1월 6일에 나온 재선 대통령의 연두교서는 그런 의미에서 의외였다. “지금 다급히 필요한 것은 국가의 근간이 되는 헌법의 변화가 아니라, 헌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일 뿐입니다.” 즉, 개헌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그 순간, 개헌안 발의를 대통령 스스로 포기하고 나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루스벨트 대통령의 결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헌정사에서 개헌이 갖는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200여 년 미국 헌정사는 총 27차례의 개헌을 경험한 바 있다. 평균 잡아 얼추 8년에 한 번꼴로 개헌한 셈이니 결코 적은 수는 아니다.
하지만 우선 27차례라는 숫자의 신빙성부터 따져 보자. 사실 연방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내용의 수정헌법 1∼10조(이른바 권리장전)는 진정한 의미의 개헌이라 보기 어렵다. 이는 제헌 당시 연방 권력의 비대화를 우려하는 일부 주에 비준에 대한 반대급부로 약속된 일종의 정치적 타협책이었기 때문이다. 약속은 지켜지고 결국 헌법 비준 직후인 1791년 권리장전이 채택된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첫 개헌은 오히려 제헌 과정의 일부로 보는 게 진실에 가깝다.
그렇다면 나머지 17개의 수정헌법은 어떠한가. 예를 들어 수정헌법 17조 개헌은 법조문상으로는 ‘연방 상원의원 간선제 폐지 및 직선제 전환’이라는 권력구조의 중대한 변화를 견인해 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상원 직선제는 일찍이 1830년대 잭슨 민주화 시기부터 주별로 도입되기 시작했고, 비준이 완료된 1913년에 이르면 거의 모든 주에서 이미 확립된 관행이었다. 결국 17조 개헌은 기정사실에 대한 사후 승인 이상의 의미는 별로 없었다고 하겠다.
대다수의 여타 수정헌법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헌정사에서 개헌은 ‘해결의 방책’이라기보다는 ‘해결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그 자신 율사(律士) 출신인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 교훈을 몰랐을 리 만무하다.
아니나 다를까 ‘결실’에 대한 집착을 접은 대통령은 곧이어 ‘사법부 개혁’이란 ‘방책’을 국민 앞에 내놓는다. 연방법원의 인사원칙이 혁명적으로 바뀔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대통령은 동시에 단호함과 끈질김으로 보수적인 대법원 판사들에 대해 조용한 압박을 가한다. 그 결과 1937년 3월 마침내 뉴딜정책에 대한 위헌 판결은 중단된다. 미국 사상 가장 진보적인 뉴딜 체제, 그 후 반세기 가까이 갈 진보의 시대가 열리는 분수령이었다.
개혁 없는 개헌은 본말 전도
이렇게 볼 때 정녕 ‘꿈꾸는 진보’라면 작금의 개헌 정국을 맞아 떠올려야 할 뉴딜의 추억도 한결 선명해진다.
진보의 꿈은 개혁이지 개헌이 아니다. 개혁의 성패는 개헌에 달려 있지 않다. 다만 개혁이 성공한 연후 그 성과물을 개헌의 형태로 선포하면 그만이다. 개헌은 무릇 개혁의 ‘방책’이 아니라 그 ‘결실’이다. 선(先)개혁 후(後)개헌이 진보의 순로(順路)인 것이다.
이치가 이러함에도 강행되는 ‘개혁 없는 개헌’. 필시 개혁 부진의 책임 전가, 분명 개헌 추진의 본말 전도다.
김성호 객원논설위원·연세대 교수 sunghoki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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