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진영]아무리 신문이 밉더라도…

  • 입력 2006년 12월 23일 03시 02분


노무현 대통령이 또 신문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21일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자리에서다. 아내와 이틀에 한 번씩 말다툼을 하는데 그게 신문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문기자들이 공무원들을 괘씸하게 생각한다는 말도 했다. 예전에는 무슨 기사를 쓰든 장관이 술도 사고 인사도 했는데 요즘은 과장 국장 사무관이 기사의 시시비비를 따지니까 괘씸해 한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근거 없는 신문 때리기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 장관이 아닌 사무관이 기사를 읽고 뻣뻣하게 나와서 괘씸해 한다는 황당한 주장에는 애써 반박할 가치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발언을 곱씹어 보는 이유는 그의 참을 수 없는 무례함 때문이다.

대통령은 이제 공무원들이 잘못된 보도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신문기자들이 함부로 쓰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기자들은 괘씸한 공무원들의 뒤를 열심히 캐니 “공무원들이 정신 바짝 차린다”고 했다. 감사원장이 할 일을 언론이 대신 해 준다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정부와 신문 상호 간의 건전한 견제 기능이 활성화돼 신문 보도의 질도 높아지고 공무원 사회도 맑아졌다.”

민주주의 공론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위선의 미덕을 지적한다. ‘위선의 교화적 힘(civilizing force of hypocrisy)’이라는 개념인데, 빈말이라도 예의를 갖추어 하는 것이 다양한 견해를 주고받는 공론 활성화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언론을 좋아하는 권력자는 많지 않다. 토머스 제퍼슨 미국 대통령도 사석에서는 신문을 읽지 않는 사람이 신문을 보고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보다 낫다며 불평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명언으로 기억된다. 정부 비판을 금지하는 내란죄(Sedition Act)를 폐지해 “의회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만들 수 없다”는 수정헌법 1조를 권리로서 확립한 사람도 그였다. 이것이 언론에 대한 불만을 감추고 “정부 없는 신문이 낫다”고 공언한 위선의 힘이라면 기자도 ‘위선적’인 대통령을 원한다.

이진영 문화부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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