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한기흥]적과 동지

  • 입력 2006년 11월 21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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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29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악몽 같았던 베트남전쟁의 종결을 공식 선언했다. 2개월 전인 1월 27일 미국, 남베트남(월남) 북베트남(월맹), 남베트남공산주의세력(베트콩) 등 4자가 평화협정을 체결한 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그러나 미군이 철수하자 남북 베트남 간에 전쟁은 재개됐고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은 1975년 4월 30일 공산군에 함락됐다. 평화협정은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토니 스노 미 백악관 대변인이 18일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한국전쟁의 공식 종료를 선언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1953년 7월 체결된 정전(停戰)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를 논의할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북한이 쉽게 핵을 포기할 리도 없고, 정전협정 서명 당사국인 미국 북한 중국의 생각도 같지가 않아 지난(至難)한 일이나 그렇다고 무시해 버릴 수도 없는 제안이다.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 직후엔 줄곧 ‘남북 간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했으나 1974년 이후에는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겠다고 태도를 바꾼다. 실제론 북베트남과 미국이 남베트남을 따돌린 채 교섭했던 평화협정 체결에 영향을 받은 탓이다. 남북은 1991년의 기본합의서와 2000년 6·15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문제를 제대로 논의한 적이 없다. 북한이 남한을 정전협정 서명 당사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한 데다가, 미국과 중국도 한반도의 장래에 대한 일치된 밑그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한이 포함된 ‘한반도 평화를 위한 4자회담’이 1997년부터 99년까지 6차례 열리기는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할 시기가 와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에 급격한 변화가 오고, 북-미 수교까지 이뤄지게 된다면 분단 이후 반세기 넘게 유지돼 온 ‘적과 동지’의 개념이 바뀔 수도 있다. 북이 핵을 포기하고 난 다음에야 생각해 볼 수 있는 꿈같은 얘기지만 대비는 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베트남 평화협정 체결 때처럼 북-미가 직거래를 안 한다는 법도 없지 않은가.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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