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김수환 추기경이 겪은 현대사

  • 입력 2006년 6월 13일 23시 24분


백발의 노인들 손에 ‘KBS 시청 거부’ 같은 구호를 적은 노란색 종이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KBS 드라마 ‘서울 1945’가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을 왜곡하고 있다고 항의하는 기자회견 자리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장택상 총리 등 광복 당시 주요 인사의 아들딸들이 참석해 ‘서울 1945’의 이런저런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시청자들은 드라마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을 것 아니냐”며 울분을 터뜨렸다.

문득 김수환 추기경의 말이 생각났다. “나라가 정말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걱정 때문에 팔십이 넘은 노인들이 나서는 겁니다.”

1998년 은퇴 생활에 들어간 김 추기경은 사회 원로로서 아직도 확고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어느 인사는 그에 대해 “싸움하는 사람들을 떼어 놓고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 큰어르신, 길을 잃은 사람에게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일러 주는 어르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존경받는 원로인 동시에 현대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역사의 중대 고비마다 현장에 있었고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증언이 호소력을 갖는 이유다.

5월 31일은 그가 주교가 된 지 40년이 된 날이었다. 그는 기념행사를 하자는 주변 제의를 물리쳤지만 주교 수품 40주년이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그는 1966년 주교가 되면서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직도 맡았다. 이듬해 삼도직물이라는 회사에서 노조원들의 해고 사태가 발생하자 그의 건의로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성명서’가 발표됐다. 한국의 가톨릭교회가 내놓은 첫 번째 사회적 발언이었다. 그의 현실 참여는 주교가 된 후 시작된 것이다.

그가 30년간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명동성당은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그를 둘러싼 일화가 많지만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 명동성당에 피신한 대학생들을 지켜 낸 일은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사건이었다.

정부 고위 관계자가 명동성당에 경찰을 투입하겠다는 방침을 통보하려고 김 추기경을 찾아갔다. 넥타이를 맨 직장인까지 시위에 참여하는 등 봇물 터지듯 나온 민주화 요구를 강경 대응으로 막아 보겠다는 신호였다.

김 추기경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먼저 저를 만나게 될 겁니다. 그 다음 신부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수녀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면 저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를 밟고 가십시오.”

한국의 민주화는 모두가 나름대로 기여해 이뤄 낸 결과라는 게 김 추기경의 지론이다. 물론 민주화세력의 공과 천주교의 역할도 컸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민주화세력이라는 것을 더는 가슴에 달고 다니지 않겠다”고 말했다지만 스스로 민주화세력임을 내세우며 열매를 따 먹은 사람들이 새겨야 할 말이다.

요즘 김 추기경은 ‘대한민국’이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린다. 5·31지방선거 직후 인터뷰에서도 “국민이 희망을 갖고 이 나라 안에서 살아 갈 수 있게 해야 한다”면서 “우리는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광복 이후 건국 과정을 목격한 사람이 얼마 살아 있지 않다고 해서 특정 이념의 잣대로 현대사를 재단해 국가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을 우려한다. 통일도 대한민국이 바로 선 다음에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가장 마음 아파하는 것은 경제 침체 속에서 이웃이 겪는 고통이다.

김 추기경은 스포츠 중계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한번은 우리나라 축구팀이 승리하자 감격한 나머지 혼자서 숙소 벽에 걸린 태극기에 경례를 하고 방송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따라 불렀다고 한다. 어젯밤 한국축구대표팀의 경기도 보셨을까 궁금하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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