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황호택]‘인간 연습’

  • 입력 2006년 3월 1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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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조정래 씨가 계간 문예지 ‘실천문학’ 봄호에 발표한 장편소설 ‘인간 연습’ 1회분을 흥미롭게 읽었다. 소설의 주인공 윤혁은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체포돼 평생을 감옥에서 썩은 장기수 출신. 강제 전향을 당하고 출소(出所)한 윤혁은 ‘사상의 조국이던 소련이 폭삭 주저앉고, 주체 조국은 배곯아 허덕이는’ 현실에서 참담한 패배감과 일생의 허망함을 느낀다. 작품에서 “헛살았다”는 말이 반복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인간 연습’이라는 제목은 인간은 무언가를 모색하고 시도해서 더러 성공도 하고 실패하면서 그 고단한 반복을 계속한다는 뜻이다. ‘인간 연습’은 광복 후 최대 베스트셀러라는 ‘태백산맥’의 속편(續篇)에 해당한다. ‘인간 연습’이 빨치산 소설 ‘태백산맥’과 20년의 시차를 두지 않고 함께 나왔더라면 작가가 오랜 시간 이념 공방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태백산맥’이 발표되던 시기에는 소련이 건재했다. 작가는 ‘인간 연습’을 통해 그를 고발했던 보수세력과도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 연습’은 조 씨가 추구한 분단(分斷)문학의 해피엔딩이다.

사후(死後) 14년 만에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진다는 작가 이병주 씨는 ‘태백산맥’의 무대인 지리산에서 스스로 빨치산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경남 진주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총퇴각하자 이 씨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문화예술 공작대 위원장이 됐다. 군경 토벌작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빨치산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이 씨도 하산해 투옥됐다.

그는 나중에 부산 국제신보 주필로 있다가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뒤 ‘남북한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하는 사설을 쓴 죄로 다시 수감생활을 했다. 1975년 사회안전법이 발효돼 좌익계 인사들은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감호소에 들어가야 했다. 이 씨는 유력자의 도움을 받아 신문에 반공사상을 담은 유럽기행문을 쓰는 것으로 전향서를 대신했다. 이병주 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자서전을 쓰기로 했을 만큼 서로 가까워졌다. 말년의 빨치산은 다작(多作)을 하며 좌파 이데올로기 대신에 코냑과 여인들을 사랑했다.

남북 대결의 혼돈 속에서 ‘인간 연습’의 주인공처럼 슬픈 가족사와 사상적 방황을 겪은 사람들이 오늘날 사회 지도층 중에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정진석 추기경은 부친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월북해 북한의 공업성 부상(차관)을 지낸 사실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직접 고백했다. 정 추기경은 젊은 시절에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우고 이념 서클에 가입한 적이 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작가 이문열 씨도 정 추기경과 비슷한 아픔을 지녔다. 이 씨와 고향이 가까운 작가 김주영 씨는 “그의 부친은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인으로 월북했다. 그가 대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떠돌이 생활을 한 것도 연좌제(緣坐制)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정 추기경과 이 씨는 부자가 남북으로 갈려 전혀 상반된 노선을 걸은 경우다. 이들의 삶은 사상편력의 DNA를 따진 연좌제가 얼마나 불합리한 제도였는지를 말해 준다.

대한민국은 좌익 경력자였던 두 명의 대통령(박정희, 김대중)을 가졌던 나라다. 박 대통령은 여수·순천10·19사건 때 남로당 관련 사실이 드러나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좌익 활동가였던 형이 1946년 10월 폭동 때 경찰관의 총에 사살되자 복수심으로 공산주의자가 됐다(남시욱 ‘한국 보수세력 연구’). 그러나 집권 후에는 반공을 국시(國是)로 내걸고 남쪽 체제를 다졌다.

다위니즘의 진리는 인간 사고체계에도 들어맞는다. 서식지(棲息地)의 변화에 적응해 진화(進化)하지 않는 생물체는 멸종될 수밖에 없다. 답답한 것은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사고가 과거의 시간 속에 정지된 사람들이다. 조정래 씨가 ‘인간 연습’의 대미(大尾)를 어떻게 마무리할지 궁금하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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