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

  • 입력 2006년 2월 24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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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인 딸아이가 밤늦게 택시를 탄 모양이다. 택시운전사는 “학생, 학원 갔다 오는 거야?” 묻더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해.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공부 안 해서 이 꼴이 됐잖아.”

하늘에 맹세코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학력(學歷)을 거론할 생각이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학력이 문제된 적 없는 것처럼 노 대통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만 노 대통령의 학력(學力)은 거론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의 공부가 즉각 국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반민특위의 역사를 읽은 많은 젊은 사람들이…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다 한번씩 한다”고 노 대통령은 1년 반 전 말했다. “이 역사가 계속되는 한…3만 달러시대로 가면 뭐 하냐”고도 했다. 경제와 민생보다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정부의 과거사 규명작업은 이런 대통령의 인식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반민특위를 둘러싼 역사는 그 후 새로 밝혀진 사실로 업데이트돼 ‘재인식’하자는 책까지 나왔다. 하지만 대통령의 공부와 인식, 그리고 여기서 나온 정책이 업데이트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입으로는 과거사 청산을 외치면서도 공부는 과거사에 머물러 있는 게 대통령과 그 주변의 특징이다. 대통령이 엊그제 오찬을 함께한 ‘저출산·고령화대책 연석회의’도 철 지난 공부에서 나왔다. 지난해 10월 노 대통령은 스웨덴과 네덜란드 독일의 사회협약 성공 사례를 언급하며 ‘국민 대통합 연석회의’ 구성을 제의했다. 대통령의 경제 스승 이정우 전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도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을 수없이 들먹여 왔다.

안타깝게도 유럽의 사회협약은 퇴물로 취급받고 있다. 노르웨이의 노조 간부 아스뵈른 발 씨가 2년 전 진보적 잡지 ‘먼슬리 리뷰’에 “사회협약은 깨졌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유럽 경제와 노동운동이 잘나가던 시대의 산물이 세계화시대엔 안 먹힌다는 얘기다. 당장 기업이 살고 일자리를 잡는 게 중요해서다.

스웨덴 정부 홈페이지는 “1930년대 협약을 이뤘던 사회는 변했고 1980년대 초 협약 모델에서 멀어졌다”고 했다. 1982년 바세나르협약을 낳은 네덜란드는 2001년 경기 침체로 이듬해부터 아예 국가 차원의 협약을 안 한다고 유럽산업 웹사이트 EIRO가 전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독일이 유럽의 환자로 전락한 이유를 사회협약에 묶인 탓이라고 분석했다. “노조들은 조용히 사회협약을 버리고 있으며 이젠 정부도 배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잘난 강자(强者)도, 타협하는 협자(協者)도 아닌 적자(適者)만 생존한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적응도 가능하다.

1999년만 해도 세계화 2.0 버전이었는데 2000년부터 세계화 3.0에 들어섰다고 할 만큼 세상은 숨차게 변하고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상황을 공부해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그런데 지난 15년간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보다 25%나 추락한 유럽의(7일 경제협력개발기구 자료), 그것도 수십 년 전 모델을, 심지어 시대에 안 맞아 용도 폐기된 것까지 따라야 할 이유가 뭔가.

택시운전사 말대로 대통령이 제대로 공부 안 한 탓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상상력을 발휘하자면 대통령이 이상향(理想鄕)으로 그리는 국가가 따로 있고, 공부도 여기에 맞춰 하고 있는데, 불행히도 그게 유효기간이 지난 학습자료여서 효용가치가 떨어질 뿐일 터이다. 대통령의 학력(學力)은 그래서 중요하다. 국민과 동떨어질 뿐 아니라 나라까지 뒤떨어지게 만들까 겁난다.

그 덕분에 딸아이는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깨달은 것 같다. 참여정부가 어떤 엉뚱한 일을 벌이더라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이제는 국민이 각자 적자가 되어 살아남는 수밖에 없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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