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00년 민족작가 빙허 현진건 탄생

  • 입력 2005년 9월 2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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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작가 빙허 현진건(憑虛 玄鎭健·1900∼1943)의 이름이 오랜만에 신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달 초 광복 60주년을 앞두고 정부로부터 김산(金山) 김단야(金丹冶)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훈장(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8월 동아일보 사회부장 재직 당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함으로써 일제강점기 민족의식을 고취한 공로를 뒤늦게 인정받은 것이다. 당시 현진건과 함께 일장기를 지웠던 이길용 기자에게 1991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것을 감안하면 때늦은 감은 있으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당시 현진건은 이 일로 체포돼 1년여에 걸쳐 옥고(獄苦)를 치렀고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했다.

1900년 9월 2일 대구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그는 일본에서 중학을, 중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귀국해 언론사에 입사했다. 1921년 자전적 소설 ‘빈처’를 발표해 문단 안팎에서 주목을 끌었다. 이어 그는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술 권하는 사회’(1921년) ‘할머니의 죽음’(1923년) ‘운수좋은 날’(1924년) ‘B사감과 러브레터’(1925년) 등 식민지 지식인과 서민의 암울한 삶을 생생히 그린 작품들을 쏟아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그가 1938년 7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동아일보에 장편 역사소설 ‘무영탑’을 연재했던 일도 결국 당시 언론자유가 통제된 상황에서 민족적 자긍심과 희망을 국민에게 심어주려 한 의도로 보인다. 일제의 검열 때문에 소설의 주제를 사랑과 예술로 승화했지만 당시 식민지 현실을 감안할 때 석가탑이란 신라의 아름다운 문화재를 부각시킴으로써 민족의 정서와 혼을 고양시킨 것이다.

현진건이 이 ‘무영탑’을 구상하고 집필했던 곳이 바로 서울 종로구 부암동 그의 고택이다. 그가 말년을 보냈던 이 고택은 안타깝게도 2년 전 헐렸다. 민족정기를 고양하려면 갈등을 야기하는 친일인사 명단 발표보다는 이런 민족작가의 흔적과 체취를 보존하고 그 정신을 기리는 일이 훨씬 더 건설적이지 않을까.

윤정국 문화전문기자 jk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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