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강홍빈]이삿짐 트럭과 장미

  • 입력 2005년 6월 24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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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편 인왕산 허리의 시민아파트 철거공사가 시작됐다. 주민이 거의 떠나고 창과 문 철거가 진행된 상태에서 소송이 벌어져 1년 가까이 해골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더니, 이제 해결된 듯 마지막 남은 사람들도 모두 떠났다. ‘옮길수록 돈이 생겨요’란 광고가 붙은 이삿짐 트럭 편이었다. “어차피 떠날 동넨데 뭘 그렇게 열심히 가꿉니까”라고 묻는 내게 “그래도 예쁘잖아요” 하며 손질을 계속하던 아주머니의 장미도 콘크리트와 철근더미에 묻혀 버렸다.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인왕산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해 수명이 다한 구조물을 철거하는 공사지만, 철거장비에 찢겨 나가는 보금자리를 보는 마음은 무겁다. 이런 ‘막가파’식 개발이 아니었으면 밀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방법이 없었을까. 요란한 팡파르와 함께 건설된 개발시대의 구조물들이 40년을 못 넘기고 무더기로 헐리고 있다. 부실한 구조물이야 헐어낼 수 있지만 부실 개발, 과잉 개발이 남긴 후유증은 넓고 깊어 바로잡기가 어렵다.

그런 후유증에서도 가장 고질적인 것이 부동산 투기다. 재정이 빈약하던 시절, 정부는 통제력을 무기삼아 민간의 부동산 투자와 투기를 부추겨 개발의 촉진제로 삼았다. 아파트가 요지부동의 재테크 수단이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오죽하면 이삿짐 트럭의 광고가 ‘옮길수록 돈이 생겨요’일까. 그러나 이것도 서민 수준의 얘기고, 이제 있는 사람들은 그저 눌러앉아 버티기만 해도 돈이 생긴다. 그것도 하루 자면 천만 원대, 억 원대로 말이다.

온 나라가 일부 지역의 아파트 값 상승 파동으로 난리다. 이런 사태가 투기 근절을 지상 과제로 아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 때문에 촉발됐다니 희극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당국자는 “정책은 좋았는데 시장이 문제였다”고 강변한다. 수술은 잘했는데 환자가 나빠 병이 도졌다는 격이다. 아무래도 이들은 규제와 통제로 만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계획만능주의에 빠진 것 같다. 투기 근절을 한다면서 온 나라에 대형 개발사업을 만드는 게 그 증좌다.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손’이 투기 근절의 묘약이라는 시장만능주의도 믿을 수 없다. 어떻게 투기 자본의 무한한 식욕을 한정된 공급으로 채워줄 수 있을 것인가. 제어되지 않은 개발시장은 소수가 개발 이익을 독점하는 약육강식의 무대일 뿐이다. 고삐 풀린 개발은 중산층을 파괴해 빈익빈 부익부를 키운다는 게 선진자본주의 도시들의 공통된 경험이다. 이들 도시에 새로 솟은 호화 아파트들의 그늘에는 일자리와 살 곳을 잃은 노숙자들이 넘쳐난다.

40년의 ‘개발편집증’에서 벗어나나 했더니 우리 사회는 이제 ‘개발분열증’에 걸렸다. 계획만능, 시장만능, 양쪽 다 반쪽의 진리가 전체라고 우긴다.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라고 칸트는 말했다. 마찬가지다. 시장 없는 계획은 공허하고, 계획 없는 시장은 맹목이다. 우리 사회가 이 분열증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집과 땅은 돈 벌기 위한 수단이고 사람은 돈 벌기 위해 사는 기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병으로 개발주의는 판을 치고 우리의 땅과 삶은 멍들고 황폐해진다.

불로소득은 차단돼야 하고 개발이익은 환수돼야 한다. 개발 엘리트만이 아니라 약자와 대변되지 않는 사람들이 보호받는 개발, 녹지를 새로 파헤치는 개발이 아니라 낙후된 기성 시가지를 되살리는 개발, 단기 이익보다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부동산 개발에서 산업 경쟁력을 키우는 쪽으로 사회의 자본과 에너지가 옮겨져야 한다. 그래서 집과 땅은 상품이기 이전에 삶의 터전이라는 기본적인 가치가 회복돼야 한다.

서부 개척 시절, 자니 애플시드는 사과 씨로 가득 채운 배낭을 지고 다니며 곳곳에 사과나무를 심어 유목민 같은 개척자들을 정착민으로 이끌었다. 서민이 옮겨 다녀야 하지 않고 뿌리내려 장미를 가꿀 수 있게 만드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 이 시대의 과제다.

강홍빈 객원논설위원·서울시립대교수·도시공학 hbkang@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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