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대근]논개(論介) 영정

입력 2005-05-11 18:09수정 2009-10-09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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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렬은/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시인 변영로는 의기(義妓) 논개의 우국충절을 이렇게 노래했다. 1593년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적장을 유인해 그를 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비장하고도 애달픈 역사가 이 시에 살아 있다.

▷구전되던 논개의 충절이 문헌에 등장한 것은 1620년 무렵이다. 유몽인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처음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진주 사람들이 논개가 몸을 던진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긴 것도 그때쯤이라고 한다. 그 후 1739년 진주성에 논개사당인 의기사(義妓祠)가 세워지고 1868년에는 추모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올해도 의암별제를 이어받은 진주 논개제가 이달 27일부터 사흘간 열린다.

▷뜻 깊은 이 행사를 앞두고 엊그제 진주지역 일부 시민단체 회원들이 의기사에 몰려가 관리소 직원들의 제지에도 아랑곳없이 논개 영정을 떼어냈다. 영정을 그린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는 친일 화가라며, 호국 성지인 진주성 안에 친일 잔재를 남겨 둘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얼마 전엔 비슷한 연유로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 의사의 사당 현판이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이당은 우리나라 근현대 화단의 한 거봉(巨峰)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제자를 기른 예술가라는 평가도 받는다.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한유동 등 그의 제자들이 한국 화단의 큰 맥을 이루고 있다. 이당이 친일 화가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친일 미술단체에서 활동했고 일본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작품도 남겼다. 그러나 과거 청산은 거기에서 교훈을 얻는 ‘미래를 위한 생산적 작업’이어야 한다. 송두리째 부수고 짓밟기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중국의 문화혁명이 자꾸 떠오르는 요즘이다.

송대근 논설위원 dk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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