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고건의 笑而不答

  • 입력 2005년 4월 6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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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又民)이라. ‘다시 백성이다’라는 뜻인데 고건(高建) 전 국무총리의 아호(雅號)다. 그는 지난해 가을 우민과 우청(又廳·다시 듣는다) 중 무엇을 고를까 하다가 주위 사람들이 더 좋다고 하는 우민을 택했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에 이르는 43년 세월 동안 공직과 민간인 신분을 일곱 차례 왕복했다. 일곱 차례 공직도 장관 세 차례(교통·농수산·내무)에 서울시장 두 차례(관선·민선), 국무총리 두 차례이니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관운(官運)’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나라의 부름을 받아 공직에 나갔다가 소임을 다하면 물러나 다시 백성의 자리로 돌아왔으니 우민이야말로 자신의 호로 제격이 아닌가 여기는 듯싶다.

그런데 백성이 그런 우민에게 다시 공직을 맡으라고 한다. 그것도 최고의 공직인 대통령 자리다. 하기야 저잣거리 민심이란 조변석개(朝變夕改)여서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를 노릇이고, 다음 대선까지는 아직 2년 8개월이나 남아 있어 그동안 무슨 변수가 돌출할지 가늠조차 하기 이르지만 그렇다고 ‘고건 신드롬’을 한때의 거품 인기로 폄훼할 수는 없을 터이다.

▼도덕성과 생산적 리더십▼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 9월 이후 ‘차기 대통령 후보 고건’은 모든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동아일보가 창간 85주년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일반 국민은 차기 대통령 후보감으로 고 전 총리를 1위(29.5%)로 선호했다(2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15.7%). 그는 국정 관리 능력 등 리더십과 관련된 5개 항목에서도 모조리 1위를 차지했다.

지난 일요일 점심때 창경궁 맞은편 골목의 한정식 집에서 만난 고 전 총리와 기자는 선(禪)문답하듯 인사를 나누었다.

“여전히 소이부답(笑而不答)이신가요?” “안 그러면 어쩌겠어요.”

정치 문제를 꺼내면 계속 웃음으로 대신하겠느냐는 물음에 현재 내 처지가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답이다. 지금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든지 그것은 차기 대통령 후보의 말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고 그럴 경우 임기가 아직 절반 이상 남은 대통령에게 누(累)가 되지 않겠느냐, 그것은 얼굴을 붉히고 헤어졌든 아니든 현 정부의 초대 총리로 일했던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국정에 참여하면서 국민에게서 받은 혜택을 갚아야 한다는 책임감은 잃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음)의 신중함과 안인(安人·주위 사람을 편안하게 함)의 덕목, 이렴(利廉·청렴한 것이 아름답다)의 좌우명이 오늘의 고건을 있게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대중은 안정성 못지않게 강력한 리더십의 지도자를 원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리더십의 요체는 무엇인가.

“첫째는 도덕성이죠. 이제는 ‘10분의 1의 도덕성’이 아닌 완전한 도덕성을 갖춰야 합니다. 둘째는 민주적 리더십이고, 셋째는 국민통합을 바탕으로 한 생산적 리더십입니다.”

그는 세 가지 조건이 갖춰질 때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국민의 신뢰야말로 강력한 리더십의 근본이라고 믿고 있다. 원칙론이라고는 하지만 꼭 그렇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10분의 1’과 ‘생산적 리더십’은 노 대통령이 지난 2년간 보인 ‘수사학 정치’와 ‘파괴적 리더십’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 아닌가.

▼독자적 산물인가, 반사효과인가▼

고 전 총리는 3월 16일 미국 하버드대 강연에서 “북한이 계속 6자회담 참가를 거부하고 핵개발을 계속한다면 한국 정부로서는 북한 핵문제와 대북 경협을 연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역지사지(易地思之·처지를 바꾸어 생각함)와 인내를 함께 요구했다지만 현 정부의 기본 방침과는 분명히 선을 그은 셈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이미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자가 고 전 총리를 만난 날 ‘고사모(고건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우민회’가 떴다. 그러나 ‘고건 신드롬’이 독자적 산물인지, 현 정권의 불안정성이 낳은 반사효과의 산물인지는 머잖아 본격적인 검증대에 오를 것이다. 그가 ‘소이부답’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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