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이상돈]‘유죄협상제도’보다 서둘러야 할 일

  • 입력 2005년 1월 21일 17시 56분


코멘트
최근 검찰은 형사재판에서 유죄협상제도(플리바기닝·plea bargaining)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이 이 제도를 도입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석연치 않다.

유죄협상제도는 미국에서 발전한 형사사법제도인데, 배심(陪審)재판 제도와 관련이 깊다. 미국 헌법은 국민이 배심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배심재판은 오래 걸리고 매우 복잡하며 검찰과 피고인 모두에게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부유한 사람은 일급 변호사를 동원할 수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피고인이 배심재판을 포기하면 검찰은 죄목을 가벼운 것으로 대체하거나 형량을 경감해 주는 것이 유죄협상제도다. 판사가 협상 내용을 확인하면 사건은 종결된다. 미국 형사재판의 약 90%가 이렇게 처리된다.

유죄협상제도를 통해 피고인은 경감된 처벌을 받고, 검찰은 사건을 빨리 처리해 더욱 많은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 1996년 미 해군정보국의 군사기밀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로버트 김 사건도 그렇게 처리됐다. 당시 연방 검찰은 연방수사국(FBI)이 수집한 증거를 쥐고 있었기에 김 씨가 유죄협상제도를 받아들였고, 검찰은 그에게 간첩죄(최고형 사형)가 아니라 간첩모의죄(최고형 10년)를 적용했다.

미국 검찰은 유죄협상을 신속히 이끌기 위해 법정에서 사용될 수 없는 증거로 피고인을 압박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협상을 거부하는 피고인에게 법정최고형을 구형해 심리적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88.30달러짜리 수표 한 장을 위조한 피고인에게 검사가 징역 5년을 제안하자 피고인이 이를 거부한 적이 있다. 그러자 검사는 누범 조항을 적용해 종신징역을 구형했고, 선고도 그렇게 내려졌다. 피고인이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검찰의 조치가 헌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시했다.

이렇듯 웬만해선 유죄협상 제안을 거부하기 어렵다. 그 때문에 재판도 해 보지 못하고 유죄협상으로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어 이 제도가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피고인은 유죄협상을 받아들이는 데에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고 배심재판을 요구할 수도 있어 일반적으로 합헌으로 본다. 다만 형사사법이 검사와 변호사의 협상에 좌우된다는 점만은 문제가 있는 게 사실이다.

미국의 경험에 비춰 유죄협상제도를 도입하려는 우리 검찰의 구상에는 문제가 많다. 마약 뇌물수수 등 물증 확보가 어려운 사건에 이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것부터 그렇다. 피고인이 유죄협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검찰이 확보한 증거 때문이다. 검찰이 법정에 내놓을 증거를 갖고 있지 않음을 알고도 유죄협상에 응할 멍청한 피고인은 없다. 그러나 우리 검찰은 유죄인정을 통해 자백을 이끌어 내겠다고 한다. 검찰은 수사에 협력하는 피고인에게 형사면제를 약속해 증거를 확보하는 제도를 생각하는 것 같으나 그것은 유죄인정제도와 구분돼야 한다. 사실 유죄인정을 통해 자백을 받아 내겠다는 것은 독재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발상이다.

최근 피의자와 피고인의 권리가 대폭 향상돼 검찰은 수사와 기소에 애로를 겪고 있다. 범죄는 범인 탓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이라는 온정론(溫情論)의 만연도 범죄와의 전쟁을 어렵게 한다. 하지만 유죄협상제도는 우리 형사제도가 안고 있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상돈 중앙대 교수·법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