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39>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8월 24일 18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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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彭城에 깃드는 어둠(6)

왕릉이 늙은 어머니를 풍읍(豊邑) 근처에 그대로 남겨둔 것도 그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왕릉은 남양에 자리 잡기 바쁘게 사람을 어머니에게 보내 모셔오게 했다. 그러나 외아들이 떠난 뒤로 친정 마을에 몸을 의탁하고 숨어 지내던 왕릉의 어머니는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네 효성은 갸륵하다만, 장부가 큰일을 하는데 늙은 어미가 짐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여기 잘 있으니 너는 네 뜻을 펼치는데 온 힘을 쏟아라. 지금은 내가 있는 듯 없는 듯 여기 숨어 사는 게 오히려 너를 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어미를 데려다 호강시키는 일은 네가 큰일을 한 뒤라도 늦지 않다.”

왕릉이 보낸 사람을 통해 그렇게 당부하고는 있던 그대로 작은 시골 마을에 조용히 묻혀 살았다. 그런데 뜻밖으로 그 어머니가 팽성으로 끌려갔다는 말을 듣자, 왕릉은 기가 막혀 어쩔 줄 몰라 하다 문득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빠른 말에 안장을 얹어라. 내 패왕에게 달려가 이 한 목숨을 내주고 어머님을 구하리라!”

그때 빈객처럼 왕릉의 진채에 머물고 있던 한(漢)나라 장수 설구(薛歐)와 왕흡(王吸)이 말렸다.

“장군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모든 일을 차분히 헤아리시어 후회가 없도록 하셔야 합니다. 항왕은 기고만장하여 천하에 저밖에 없는 줄 아는데다, 성정이 포악해 한번 저를 거스른 자를 용서하는 법이 없습니다. 장군께서 우리 한왕께로 드시기 전이라면 모르거니와, 이미 항왕이 내린 10만호와 상장군 벼슬까지 마다하고 그 사자까지 비웃어 쫓아 보냈으니, 이제 와서 돌아간다 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장군뿐만 아니라 자당(慈堂)까지도 살아남기 힘들 것입니다.”

“그럼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든 왕릉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이번에는 왕릉의 조카가 되는 왕흡이 나서 말했다.

“먼저 사람을 보내 팽성의 동정을 살펴보신 뒤에 뜻을 정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구나. 먼저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은 뒤에 내가 움직여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왕릉도 그렇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곧 말 잘하는 이졸 하나를 뽑아 팽성으로 보냈다. 왕릉이 보낸 사자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자 항왕은 왕릉의 어머니를 불러내 얼러댔다.

“반드시 아드님을 바르게 가르쳐 한왕의 가솔들을 끌고 팽성으로 오게 하시오. 그리되면 모자분이 모두 부귀를 누리며 천수를 다할 것이나, 아드님이 기어이 마다하면 노부인은 가마솥에 삶기게 될 것이오!”

그런 다음 항왕은 따로 군막을 내어 왕릉이 보낸 사자를 만나보게 하였다.

왕릉의 어머니를 몹시 존대하는 척 동쪽을 향해 앉게 하고 아들의 사자와 단둘이 마주하게 할 때만 해도 항우에게는 패왕다운 자신감과 도량이 있었다. 왕릉의 어머니가 자신의 위엄에 눌려 아들을 불러들일 것이라 믿은 것이지만 곧 그것은 패왕의 터무니없는 자부심이요 허영이었음이 밝혀졌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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