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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5월 21일 17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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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감성으로 그린 ‘몇 도시 이야기’
이 별에서 수십년을 보냈다. 시선이 닿았던 곳을 모두 더해도, 광활한 대지 위에서는 몇 개의 점에 지나지 않는다.
오월의 대기에서는 달큼한 향기가 난다. 태양은 금빛을 흩뿌리며 사위어간다. 지평선은 속삭인다. ‘오라!’고. 그러나 누가 가르쳐 줄 것인가. 내 마음이 찾아 헤매는 그곳이 바로 그 어디에 있다고.
거대한 성당과 박물관을 알려달라는 것이 아니다. 기찻길과 항로를 말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미소에 어떤 추억과 기대가 섞여 있는지 알고 있다고, 사람들은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사랑하고 죽는지 알고 있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게으른 산책자/에드먼드 화이트 지음 강주헌 옮김/272쪽 9000원 효형출판
○ 파리를 멋지게 배회하는 법
‘게으른 산책자’의 원제 ‘Fl^aneur’는 만유가(漫遊家)를 뜻한다. 미국인으로 프랑스 ‘예술 및 문학회’ 정회원인 저자 화이트에 의하면, 파리는 혼자 산책하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다. ‘색바랜 듯한 파리의 세계는, 혼자 걸어야 구경할 수 있다.’
이곳에서 만유가의 역사는 연원이 깊다. 보들레르는 산책을 ‘삶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는 만화경’에 비유했다. 피카소는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 근처를 배회하며 몇 차례나 새 연인을 찾아냈다.
이 도시에서 모든 것의 우선권은 ‘멋진 것’에 주어진다. 차이를 인정하는 ‘톨레랑스’는 연원이 깊으며, 특히 성적 취향에서 그렇다. 일찍이 나폴레옹은 동성애를 벌주자는 측근의 진언에 ‘프랑스는 법으로 그런 범죄를 단죄하는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로 답했다.
◇아주 미묘한 유혹/데이비드 리비트 지음 엄우흠 옮김/224쪽 8000원 효형출판
○ 피렌체, 우아한 죽음
‘피렌체에서 죽음은 다른 곳보다 덜 무서운 동시에 더 매혹적이다.’
저자 리비트는 ‘피렌체에서는 쉽게 과장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얘기는 단지 과장이 아니다. 도시 곳곳에서 생살이 찢긴 그리스도의 수난상을 볼 수 있다. 유럽 전역에서 사람들이 석양에 물든 강을 바라보며 죽기 위해 찾아온다. 영화 ‘전망 좋은 집’의 로맨스도 거리의 살인사건을 보고 여주인공이 혼절한 데서 싹튼다.
150년 동안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은 외부인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피렌체는 외부인을 환영하지 않았다. 두오모(대성당) 오른쪽 문의 천사상도 양팔로 ‘엿 먹으라는’ 몸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휴가지의 진실/피터 케리 지음 김병화 옮김/328쪽 9000원 효형출판
○ 시드니, 건강한 아름다움
비취색 바다, 조가비 같은 오페라하우스, 세계 3대 미항. 이 모든 것은 진실이었다. 다만 진실의 일부였다. 척박해서 향기가 강한 식물 유칼립투스만 자라는 토양, 도심을 태워버릴 듯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산불, 실업수당으로 연명하며 알코올에 찌들어가는 애버리지니(원주민)…. 그러므로 번역서 제목 ‘휴가지의 진실’은 썩 잘 지은 제목이다.
그러나 부커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저자 케리는 어쩔 수 없이 시드니의 ‘건강함’에 대한 애정을 고백한다. 건강한 농부, 꿋꿋한 노동자가 나름대로의 분투 속에서 저마다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화려한 포장지를 벗겨낸 시드니의 모습이다.
세 권의 책은 영국 블룸스베리 출판사가 2001년 내놓은 ‘작가와 도시(The Writer and the City)’ 시리즈의 한국어판. 앞으로 카이로, 샌프란시스코, 프라하 편 등이 나올 예정이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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