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환상여행’…예수를 경배했던 네번째 동방박사

  • 입력 2004년 4월 16일 19시 40분


코멘트
◇환상여행/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184쪽 9000원 소담출판사

프랑스 문학계의 손꼽히는 작가인 미셸 투르니에(80)는 문학출판 편집인으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43세 때 첫 작품을 냈다.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을 패러디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프랑스 아카데미 소설 대상을 받았지만 독자들이 “어렵다”고 하자 ‘방드르디, 원시의 삶’이라는 새 작품을 다시 썼다.

이 책 역시 ‘가스파르, 멜시오르, 발타자르’(국내에선 ‘동방박사와 헤로데 대왕’으로 출간)라는 소설을 쉽게 바꿔 쓴 것이다. 원작의 제목은 아기 예수를 경배했던 세 동방박사의 이름이다.

성서는 동방박사들의 신원을 밝히지 않고, 그들이 황금(재산) 몰약(영원) 유향(신성)을 아기 예수에게 바쳤다고만 썼는데, 이 때문에 “동방박사들이 셋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이 나왔다. 성서학자들 가운데는 “페르시아에서 온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이런 추정들을 젖줄로 삼아 중세에는 갖가지 경외(經外) 전설들이, 근현대에는 소설들이 나왔다. 소설 가운데는 미국 프린스턴대 문학교수였던 헨리 밴 다이크 목사가 쓴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1905)가 있다.

투르니에 역시 ‘환상 여행’에서 네 번째 동방박사를 소설의 무대 위로 올린다. 그는 이 동방박사들은 모두 왕이나 왕자였던 것으로 봤다. 바로 이 작품의 원제 ‘Les Rois Mages’(동방박사들)의 ‘Rois’(왕들)에 주목한 것이다. 투르니에가 설정한 네 번째 동방박사는 인도 서남부 방갈로르의 왕자 ‘타오르’다.

타오르는 처음엔 터키 과자 만드는 법을 알려고 여행에 나선다. 그러다 세상을 구할 이가 왔다는 소식에 아기 예수를 보러 베들레헴에 들른다. 그러나 아기 예수의 가족은 헤롯왕의 아기 참살 명령을 피해 이미 이집트로 달아난 뒤였다. 여로에 돈이 다 떨어져버린 타오르는 한 채무자의 빚을 대신 갚기 위해 버림 받은 소돔에 들어가 광산에서 일한다. 대신 자신의 부하와 노예들에게 자유를 준다.

타오르는 예수와 닮은 부분이 많다. 예수는 33달란트의 돈을 챙긴 제자 유다의 배반으로 가시밭길을 가게 됐지만, 타오르는 33달란트의 남의 빚 때문에 스스로 죄수가 된다. 예수가 33년간 살며 인간 대신 속죄한 것처럼, 타오르도 33년간 지하 소금광산에서 몸을 바친다. 그는 결국 이 희생의 33년이 끝나가는 어느 날 예수를 만나게 된다. 예수를 가장 늦게 경배한 동방박사가 된 것이다.

투르니에는 이미 구전돼 오고 있는 동방박사 가스파르를 ‘흑인왕’으로 등장시켰는가 하면, 발타자르는 ‘예술에 빠진 왕세자’로 그려낸다. 발타자르가 모은 예술품들을 성직자들이 ‘우상’이라며 부숴 버리자 그 역시 길을 떠나게 된다.

그 여로 끝의 구유에서 만난 아기는 이후 2000년간 온갖 문학과 음악 미술 영화의 원천이 되고 만다. 동방박사들의 여로를 그린 이 작품 역시 신성한 예수의 삶과 유연한 투르니에의 상상이 합류한 지점인 것이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