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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4월 9일 17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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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연구를 보면 연구 대상에 대한 연구자의 지나친 애정으로 인해 불만을 느낄 때가 많다. 물론 연구 대상에 애정을 갖고 있지 않으면 오랜 기간 연구를 지속하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좋은 글이 나오기도 힘들다. 그러나 연구 대상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 연구 대상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독자들에게 무리하게 이해시키려 해서는 곤란하다.
이 책은 이런 문제를 비켜가기에 적절한 형식을 갖췄다. 저자(성균관대 교수·한국사)가 자료를 통해 연구 대상의 행적을 꼼꼼히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 교수는 연구 대상의 사상과 활동에 대한 평가 없이 박헌영이 어느 시기에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만을 자료를 통해 제시한다.
박헌영은 남과 북에서 버림받았던 사람이다. 남쪽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북에서는 미제의 간첩으로 처형됐기 때문에 어느 쪽에서도 반기지 않는 인물이다. 1990년대를 전후해 역사학계에서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조명이 활발할 때 잠시 연구의 초점이 되긴 했지만 그것도 10년을 넘지 못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박헌영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듯했다.
그런데 2004년이라는 현 시점에서 박헌영은 왜 다시 독자들 앞에 나타나야 하는가? 박헌영은 일제하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자로서의 길을 걸었고 광복 후에는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로서 미군정과 대립했다. 1956년 북한에서 미국을 위해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처형됐다. 일제강점기와 분단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박헌영은 계속해서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조선공산당의 책임자가 미제의 간첩으로 처형됐다는 아이로니컬한 역사적 사실은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이용한 방대한 자료는 그간 축적된 한국 현대사의 연구 수준을 잘 보여준다. 미국과 러시아에 있는 자료의 발굴, 문서로 된 자료뿐만 아니라 시각자료와 증언자료의 이용 등은 선언적 수준에 있었던 한국 현대사 연구가 이제 본격적 연구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한국 현대사 연구의 한계도 잘 드러낸다. 필자가 현대사 연구자로서 항상 고민하는 것이 ‘결정적’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과 관련된 자료에 접근하다 보면 그와 관련된 방계자료들은 수없이 많지만 결정적 자료는 찾지 못한 채 멈춰버리기 십상이다. 박헌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박헌영은 일본 제국주의의 동원체제가 가장 심했던 1939년 시점에 출옥하고 다시 공산주의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처형이 가능했을 텐데 왜 박헌영에게 미제의 간첩이라는 죄목이 씌워져야 했을까? 이런 의문점들이 남아 있는 한 박헌영은 이 책의 출간 뒤에도 계속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사 tgpar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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