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기현/핵 배낭

  • 입력 2004년 4월 7일 19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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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核) 가방’이란 미국과 러시아 등 핵 강국 정상들이 핵무기를 통제하는 통신장비가 들어있는 ‘블랙박스’를 가리킨다. 두 나라 대통령은 재임 중 핵 가방을 늘 곁에 둔다. 정권이 바뀔 때 신임 대통령이 가장 먼저 챙기는 것도 핵 가방이다. 심장 수술을 2차례나 받았던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총리에게 맡겨 놓은 핵 가방부터 되돌려 받았다. 핵 가방이 국가안보는 물론 막강한 권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또 다른 핵 가방도 갖고 있다. 고층 건물 2, 3개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위력을 가졌지만 무게는 가장 작은 것이 30kg 정도밖에 안 되는 소형 전술용 핵폭탄이다. 미국에서는 파괴용 특수핵폭탄(SADM)이 원래 이름이다. 배낭처럼 생겨 등에 메고 운반할 수 있다고 해서 ‘핵 배낭’이라고도 불린다. 몰래 적의 심장부까지 갖고 들어가 시한폭발 장치를 해 둔 뒤 빠져나올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가 이 무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공개한 적이 없어 소문만 무성할 뿐 정체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최근 러시아의 전략미사일군 사령관을 지냈던 빅토르 예신 장군이 이 무기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해 화제다. 러시아군은 지금까지 공식적으로는 이 무기의 존재 여부마저 밝히지 않고 침묵해 왔다. 그래서 군이 아닌 특수기관이 관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그러나 예신 장군은 RA-115라는 이름은 물론 이 무기가 실제로 존재하고 전략미사일군이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밝혔다.

▷1997년에도 이 무기 때문에 떠들썩한 논란이 있었다. 2년 전 헬기 사고로 사망한 장성 출신의 정치인 알렉산드르 레베드 장군이 처음으로 이 무기의 존재를 밝히면서 “옛 소련이 보유했던 132개의 핵 가방 중 48개가 없어졌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핵무기 관리가 이처럼 부실하니 이 무기가 언제 북한 같은 나라나 알 카에다 등 테러단체의 손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전 세계가 테러 공포에 떨고 있는 오늘날에는 초강대국 정상들의 핵 가방보다는 언제 테러에 사용될지도 모를 ‘핵 배낭’이 더 두려운 현실이다.

김기현 모스크바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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