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종훈/장관님의 '불법 모금'

  • 입력 2004년 1월 16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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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부터 민족문제연구소와 한 인터넷 매체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해 벌이고 있는 모금운동이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행위로 드러났으나 소관 부처인 행정자치부 장관이 오히려 이를 두둔하고 있어 빈축을 사고 있다.

행자부 재정과는 15일 오후 6시반경 민족문제연구소에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불특정 다수인에게 성금을 모금하는 것은 위법이므로 즉시 모금을 중단하고 법 절차를 따라 달라”는 장관 명의의 공문을 보냈다.

기부금품모집규제법에 따르면 기부금 모집은 행자부와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다. 이 모금운동은 이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행자부의 요청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최측과 일부 네티즌이 반발하자 행자부는 2시간 만에 “모금 중단 요구를 철회한다”는 공문을 다시 주최측에 보냈다. 다시 보낸 공문에는 ‘실무진이 잘못 판단했다’는 해명도 들어 있었다.

행자부 고위 관계자는 “실무진이 법리적 해석에만 얽매여 잘못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법리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장관의 질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허성관(許成寬) 행자부 장관은 “모금운동을 중단시키지 말고 법적 근거를 갖게끔 사후 절차를 밟게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행자부는 당초 이 불법 모금운동을 일주일이나 모른 척하고 있다가 일부 시민단체가 “우리도 정부의 허가 없이 모금운동을 하겠다”고 항의하자 부랴부랴 공문을 보냈다.

뒤늦게 공문을 철회하면서 행자부가 군색하게 이 모금운동의 순수성과 자발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취지만 좋으면 법을 어겨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허 장관의 태도는 더 큰 문제다. 허 장관은 한 인터넷 매체에 “나도 10만원을 냈다. 모금의 순수한 뜻을 감안해 사후 신청해도 허가해 주겠다”고 말했다.

장관은 법에 따라 국정을 책임지는 각료라는 점을 감안하면 허 장관은 “이번 모금운동은 어쨌든 불법이니 일단 중단하고 법적 절차를 밟은 뒤 다시 시작하라”고 말했어야 한다.

이종훈 사회1부 기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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