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박성희/부패 권하는 사회

  • 입력 2003년 11월 20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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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꼬리가 보이더니 오늘은 다리가 보인다. 색깔과 무늬가 같은 것으로 보아 한 종류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대체 몸통은 얼마나 클까. 연일 언론의 창(窓)을 통해 조금씩 비치는 이 거대한 공룡의 이름은 ‘부패’다. 실타래 풀리듯 조금씩 풀려 나오는 정치인과 기업인의 검은돈 추문과 이를 둘러싼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식 정치자금 공방전은, 그렇다면 하나의 실패에 감긴 실뭉치일지 모른다. 그 실이 다 풀릴 때까지 국민은 놀랍고 허탈한 뉴스를 계속 접해야 한다.

▼학생들까지 ‘이중계약’ 익숙 ▼

사태의 인식이 이쯤에 이르면 뉴스도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마치 한가지 장르의 영화처럼 주인공만 바꿔 엇비슷한 플롯으로 이어지는 판박이 뉴스는 감상의 포인트를 “무슨 뉴스인데?”에서 “이번엔 누구인데?”로 옮겨 놓았다. 등장인물이 계속 바뀌니 지루하진 않아도, 국민은 당분간 가슴 쓸어내릴 소식을 계속 들어야 한다. 공룡이 실제 모습을 드러낸 후에는 그 추악한 모습에 또 얼마나 놀랄 것인가.

요즘 언론에 오르내리는 부패 당사자들의 행태를 보면 부패에도 다양한 등급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가장 죄질이 나쁜 사람은 부패의 현장을 직접 연출, 지휘, 감독하고 수확물을 고스란히 자기 호주머니로 가져간 사람들일 것이다. 그 현장에는 엑스트라도 있고, 알고도 모른 체한 구경꾼도 있다. 터가 나빠 어쩔 수 없이 물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다양한 부패인들의 군상을 보면 마음 한쪽이 서늘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기획된 부패야 그렇다 치고, 구조적인 불법은 우리 모두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패라는 공룡은 몇 사람이 던져주는 먹이만으로는 그렇게 몸집이 커질 수 없다. 공룡이 안락하게 살아 번식하려면 소위 생태적인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초식공룡도 쑥쑥 자랄 정도로 쾌적한 환경이 조성돼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公)과 사(私), 불법과 합법 같은 화해하기 어려운 양극과 이중계약 된 삶을 힘겹고 복잡하게 꾸려 오고 있다. 부동산을 사고팔 때에도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이른바 다운계약이라는 이중계약을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고 당국도 사실상 이를 조장한 측면이 없지 않다. 실제가격 그대로 신고하려 해도 이를 세금이 가로막고 중개인이 반대하고 이웃이 나무라는 희한한 구조다.

공교육과 ‘계약’한 학생들은 다시 사설학원과 이중계약을 한 채 그 둘의 계약조건을 충족시키려 아침밥을 거르고 밤잠을 설친다. 입시제도는 수능과 내신을 모두 요구하지만, 정작 공교육은 학생들의 배움의 열기를 다 채워주지 못한다. 사교육과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트도록 만든 주범은 학생도 학부모도 아닌 공교육 제도인데도, 학생과 학부모는 이중계약을 참아내고 있다. 힘들어도 어떻게든 적응해 보려고 안간힘이다.

정치인은 합법적인 자금과 불법자금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복잡한 장부기록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니 카드 대신 무거운 현금을 상자째 날라다 쓸 수밖에 없다. 양심고백이라도 할라치면 철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돼지저금통으로 일순간 감동이 일어났다가도 유전자처럼 내려오는 불법자금 문제가 이내 발목을 잡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회’ 왔으면 ▼

이런 이중의 계약구조가 양산해 내는 가장 큰 부조리는 사람들의 성정(性情)조차 이중으로 바꿔 놓는다는 사실이다. 성실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이중계약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 보면 영악하고 눈치 빠른 사람이 된다. 미국을 욕하면서도 원정출산 대열에 서고, 졸부를 무시하면서 로또 복권을 사며, 재벌개혁을 부르짖으며 대기업 입사를 열망한다.

누군들 부패하고 싶으랴? 깨끗하게 돈 벌고 싶은 기업인, 정직하게 정치해 보고 싶은 정치지망생, 자녀의 인성 교육에 힘쓰는 엄마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그들이 믿는 바대로 행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계약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평범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불법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된다.

자유롭고 선한 인간들이 펼쳐내는 뉴스를 보고 싶다. 우리나라가 이중계약의 복잡한 사회라는 나의 ‘상식’을 산산이 부수는, 그런 뉴스를 듣고 싶다.

박성희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교수·언론학 shpark1@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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