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내년 총선이 '큰일' 이다

  • 입력 2003년 11월 5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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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정치판은 이상고열이다.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수사에서 시작된 사건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의 대선자금 의혹으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온 정치판으로 불길이 번지고 있다. ‘비밀장부 전쟁’이라도 벌어진 것인지, 연일 터져 나오는 이전투구식 폭로전에다 돈을 줬다는 내로라하는 기업들의 이름까지 튀어나오는 판이 되었으니 2003년 11월의 한국은 정말 피곤하다. 검찰 수사에서 속속 드러나는 대선자금 의혹도 끝이 없는 것 같다. 정치자금을 둘러싼 거센 회오리가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지 예단할 수는 없지만 지금 한국 정치는 분명 변화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개혁’과 거리 먼 싸움 ▼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야 싸움판에 정신을 잃고 있다고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쪽은 국민이다. 지금 싸움이 어떻게 결말이 지어지든 궁극적으로 모든 부담은 국민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작 고개를 숙여야 할 정치인들은 왜 서로들 싸우나. 검은돈으로 휘감긴 정치자금의 시말을 밝혀내고 정치개혁의 새 틀을 짜 보자?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당장 끓어오르는 감정적 분위기에 휘말린 정파의 모습을 보면 그런 것을 논의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단언하건대 지금 서로 싸워서 얻고자 하는 것은 정치개혁이 아니다. 표현이 거칠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상대방 죽이기’다. 왜 상대가 죽을 만큼 눌러 버려야 하는가. 6개월 앞의 국회의원 총선거 때문이다. 총선 전부터 검은돈 싸움에서 밀리다가는 선거까지 갈 것도 없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상대를 죽여야 하는 험악한 형국이 된 셈이다. 내년 총선싸움은 이미 시작됐고, 불행하게도 그 기저엔 부정적 기류가 깔려 있다. 다시 한번 물어 보자. 몇백억원씩 검은돈을 주물러 댄 것은 정치인들인데 왜 국민이 그들의 역겨운 싸움에 하루하루를 피곤함에 시달려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년 총선이 ‘큰일’이다. 지금 같은 핏발 선 분위기 속에선 내년 총선도 그런 주조에서 크게 벗어날 수가 없다. 지금까지도 선거 때만 되면 흑색선전 비방 등이 봇물 터지듯 나오긴 했지만 이번엔 강도가 훨씬 강해질 것이다. 그때까지 검은돈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얼마나 내려져 정리될지 모를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가까운 시일 안의 판가름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많은 총선 주자들은 검은돈 의혹의 멍에를 지고 나서야 하며 상대를 겨냥한 싸움도 치열할 수밖에 없다. ‘감정 선거’를 피할 길이 없다. 지금도 여론조사 결과 정당별 지지도가 20%대에서 10%대의 밑바닥을 헤매는 상황에서 열세를 빨리 만회하자니 뾰족한 수가 없다. ‘동원 선거’에 나설 것이 뻔하다. 지지 호소를 위해서라지만 경쟁자 죽이기 역할에도 나설 것이다. 이미 위력을 발휘한 네티즌 활동은 절정에 이를 것이다. 모든 것을 까발리고 끌어내리다 보면 ‘제로섬’ 선거가 되고 만다. 한마디로 내년 총선은 ‘바람 선거’다. 이쯤 되면 총선의 질퍽한 밑그림은 대략 그려진다.

또한 ‘이미지 선거’로 흐를 가능성도 높다. 정치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감안한 각 정파는 어떡해서든 새로운 이미지 부각에 힘쓸 것이다. 선거 때마다 정책 대결의 중요성이 강조돼 왔지만 그렇지 못했다. 새 이미지 심기가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지만, 자칫 알맹이는 없고 겉만 번드르르한 선거가 된다면 총선 의미는 퇴색하고 만다. 구호싸움이 거세지면서 거기서 이어지는 것이 ‘개혁 쟁탈전’이다. 정파마다 개혁의 주체임을 자임할 것이고 갖가지 개혁 아이디어란 것을 내놓을 것이다. 자칭 개혁세력과 반개혁으로 매도되는 세력간의 싸움은 오죽하겠는가. 유권자는 개혁구호 홍수에 빠질 일만 남았다. 개혁이 선거에서 결판날 일인가. 그나마 유일한 위안은 새 얼굴의 경쟁장이 되리라는 점이다.

▼‘자신’을 버릴 정당 있는가 ▼

그렇다면 유권자는 누구를 택해야 하는가. 지금 같아선 투표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그러나 실망할 것 없다. 대선자금 수렁 속에서도 과연 어느 정파가 진솔한 마음에서 유권자를 향해 정도를 걷는가를 지켜보자. 그것보다 무섭고 정확한 선택기준은 없다. 정파의 겸손함과 위기관리 능력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결국 정파의 입장에선 얼마나 자신을 버리느냐의 문제다. 검은돈의 업보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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