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경영]'국가경영'…"영국의 가치가 세계를 지배한다"

  • 입력 2003년 4월 25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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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경영/마거릿 대처 지음/649쪽 2만3000원 경영정신

“세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물질적 능력은 물론 도덕적 능력까지 지닌 나라는 미국뿐이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한 말이 아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대통령과 함께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 개편을 주도하며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를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의 말이다. 그는 2001년 9·11테러 전후의 급변하는 세계질서를 바라보며 전 세계 정치 지도자들에게 국제정세에 대한 대처방안을 훈수하는 이 책(원제 Statecraft)을 저술해 알츠하이머병으로 투병 중인 레이건에게 헌정했다.

“역사적, 철학적으로 자유라는 대의와 스스로를 동일시함으로써 지도자가 될 준비를 갖춘 나라는 미국밖에 없으므로 나는 지금의 상황을 환영한다.”

그래픽 윤상선기자

지나칠 정도로 미국을 치켜세우는 그의 말을 보면 도도한 영국인의 자존심을 포기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미국이 추구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및 가치가 바로 영국에서 비롯됐다는 것, 영국인들이 만들어 낸 이 이념과 가치는 ‘보편적’인 것이므로 모든 인류가 이를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이 역사적 과업에 일찍부터 동참했고 이제 이를 전 세계에 구현하는 데 앞장서는 ‘후발’ 동지가 됐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공통점들과 그 사람들의 가치관에 대한 인식이 지금만큼 필요했던 적은 없었다.”

대처의 보수당과 경쟁 관계에 있는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까지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미국과의 끈끈한 유대감에는 이런 ‘영국인’의 의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처가 국제사회에서 인도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고 나아가 인도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될 ‘가능성’까지도 열어 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옛 영국 식민지인 인도에는 영국의 ‘보편적’ 가치관이 ‘주입’돼 있으므로 인도는 기본적으로 믿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슬람의 가치관은 비이슬람권에 비해 개인을 덜 강조하고 공동체를 더 존중한다는 점에서 잘못됐다고 비판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슬람권 국가들도 자유와 개인주의, 직접 참여가 보장되는 체제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시한다. 그것은 모든 인류가 가야 할 길이므로. 중국 역시 그가 극도로 혐오하는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여전히 경계하고 교화해야 할 대상이다.

심지어 유럽연합조차 그에게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환상’일 뿐이다. 그는 1990년 유럽통합에 대해 반대 입장을 고수하다가 당 지도부의 반발로 자진 사임한 후 1991년 결국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가 보기에 보호무역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신좌파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유럽연합은 ‘민족’이라는 현실을 무시하고 세워진 것으로 사실상 신좌파들의 이상 실현을 위해 만들어진 허구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자유무역은 확대돼야 하지만 민족과 국가의 역할은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EHESS) 자크 르벨 총장은 2002년 2월 방한했을 때 “유럽인들은 문화적 배경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과 같은 불행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유럽연합의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아날학파의 대표적 계승자인 이 역사가의 견해와 대처의 입장은 매우 대조적이다. “좁은 유럽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며 영어권의 기득권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현실주의자 대처가 보기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유럽통합을 통해 평화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미국과 경쟁한다는 것은 이상주의자들의 꿈일 뿐이다.

물론 대처의 이 같은 주장 한가운데는 자유와 인권, 그 중에서도 ‘자유’라는 신성불가침의 원칙이 있다. ‘철의 여인’답게 그의 생각은 단호하다. 그에 따르면 자유는 인류가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삶의 조건이며 개인주의와 자본주의는 인류의 번영을 약속하는 열쇠다. 그는 모든 문화적 다양성을 넘어 전 세계 모든 국가에 이 단순명료한 기준이 ‘동일하게’ 적용되어 자유무역이 보장될 때 세계의 풍요와 안정이 이룩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영국의 기준을 온 세계에 일방적으로 들이대며 ‘강한 미국’을 예찬하는 그의 관점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답게 전쟁을 달가워하지 않는 전사”라는 대처의 예찬은 불행히도 2002년 이 책이 출간된 후 강행된 미영연합군의 이라크 침공에 의해 빛이 바랬다. 그럼에도 현재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정통 보수주의의 입장을 대변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찬반을 떠나 일단 귀를 기울여 보는 냉정함이 필요하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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