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盧통장과 세바스찬

  • 동아일보
  • 입력 2003년 3월 14일 20시 05분


루이 윌리엄스 세바스찬 주니어 3세. 이 복잡한 이름 앞에는 ‘영국의 권위 있는 귀족, 순수한 혈통’이라는 긴 수식어가 붙는다. KBS 2TV ‘개그 콘서트’ 중 ‘봉숭아학당’ 코너의 등장인물이다.
세바스찬이 하인을 내치면서 하는 말 “나가 있어!”는 10, 20대 사이에 최고의 유행어로 떠올랐다. 급우들에게 ‘천한 것들’이라며 “어디서 눈을 부라려?” 하고 잘난 척할 때 객석은 뒤집어진다. 잠시 후면 몰매를 맞고 “놀아 줘, 놀아 줘” 하고 매달릴 걸 알기 때문이다.
기득권의 추락, 정의의 승리를 보며 시청자들은 통쾌해 한다. 특히나 세바스찬을 제일 열나게 패는 사람이 평소 구박받던 하인인 것에 박장대소하면서 대리만족까지 느낀다.
▼‘기득권의 추락’ 슬픈 패러디 ▼
‘대통령과 전국 검사들의 대화’에 비친 평검사들의 모습은 거의 세바스찬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번에 검찰을 꽉 쥐었다고 자평했듯이 검권(檢權)은 세바스찬의 금발 가발처럼 땅에 떨어졌다.
평소 검찰로부터 ‘천한 것들’ 대접받고, “나가 있어!” 무시당하고, “어디서 눈을 부라려?”식 위세에 눌려 살아왔다고 생각해 온 서민들은 그러나 통쾌하다기보다 참담하다. 권위 있는 영감들의 수준이 고작 이 정도인가 싶었다며, 비로소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됐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2시간 동안 일관되게 주장한 그들의 “인사위원회 해 줘, 해 줘”는 “놀아 줘, 놀아 줘”의 슬픈 패러디였다.
세바스찬에 비해 인기가 뚝 떨어진 인물이 같은 코너에 등장하는 노 통장이다. 그의 모델인 노 대통령은 “방송 없으면 대통령 됐겠는가” “코드가 잘 맞는다” 등등 주옥같은 소재를 계속 내주는 데 비해 노 통장은 여전히 “맞습니다, 맞고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도 상대역을 냅다 때리고서 “(그러면 당신은) 맞습니다, 맞고요” 하는 폭력 통장으로 전락한 상태다.
스타됐다고 잠만 자나 싶어 의아해 하던 차에 나는 노 통장이 놀랄 만한 혜안을 지녔음을 TV토론회를 보고서야 알았다. 노 대통령은 말로 “맞습니다, 맞고요” 하는 대신 검찰 수뇌부를 못 믿는다고 내침으로써 (그러면 당신은) 맞는다는 것을 입증했던 것이다. 역시 우리나라 코미디의 경쟁력은 시대를 앞서간다. 이번 주에 못 웃기면 다음 주엔 못 나온다는 치열한 서바이벌게임 덕분인가.
어쨌거나 이제 대세는 거스를 수 없게 됐다. 검사들이 요구했던 인사위원회는 곧 가동될 예정이고, 자율이든 타율이든 검찰의 정치중립이 이루어질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다. 기왕 이리 된 바엔 “(검사들이) 작전을 잘못 짜서 내가 덕봤다”는 노 대통령의 지적대로, 법전만 들이팔 게 아니라 작전공부나 하는 게 좋다. 이것도 ‘개그 콘서트’에선 예상을 했었는지 진작에 ‘공부합시다’ 코너를 마련해 두고 있다.
대화가 논쟁으로 치달았을 때 협상과 설득의 관건은 상대를 알고 그의 심리를 예측하는 데 있다. 양측의 파워가 같지 않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평검사들이 ‘토론의 달인’이나 대통령 형의 ‘해프닝’을 거론한 것은 역린지화(逆鱗之禍)였다. 상대방이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약점을 건드리면 큰 화를 입는다는 ‘한비자’ 속의 말대로다. 신뢰로 시작해야 할 일을 아직도 유교적 전통이 시퍼런 이 나라에서 윗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며 들어가는 건 하수(下手)의 내공 부족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법칙이 있다. 상대방과 반대되는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할 때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내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은 대체로 돈과 권력으로 모아지는 법이지만, 이같이 속된 속내를 드러내면 결코 고수라 할 수 없다.
▼정치와 코미디는 동거하는가 ▼
안타까운 것은 이제 와서 아무리 공부해도 대통령과의 공개대화는 당분간 열리지 않을 것 같다는 점과, 국민의 공감대를 얻었다고 보는 이상 청와대의 개혁 드라이브가 우격다짐으로 흐를 우려가 있다는 거다. 이 점도 일찌감치 내다봤는지 ‘개그 콘서트’는 ‘우격다짐’ 코너를 내보내고 있다.
“내 개그는 양궁이야.” “왜요?” “꽂히잖아. 어때 웃기지. 웃기잖아.”
어쩌면 이 개그는 다음과 같이 바뀔지도 모른다. “내 개혁은 손이야. 꽉 쥐잖아” 또는 “내 개혁은 고무줄이야. 잣대가 맘대로 늘어나지. 어때 무섭지. 무섭잖아” 하는 식으로.yuri@donga.com
김순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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