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리오리엔트'…아시아가 세계경제를 호령하리라

  • 입력 2003년 2월 28일 17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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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리엔트/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608쪽 2만5000원 이산

《지금 세계는 지각 변동을 방불케 하는 일대 전환기에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인문사회과학이 노정하는 무력함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 귀에 들리는 것은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도로 유포되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호들갑스러운 수사학이 고작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종속 이론가로 이름을 날린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가 좋은 번역자를 만나 국내에서 출간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존 학계의 안이한 풍토에 경종을 울리면서 자못 충격적이기까지 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경제 번영과 상업 발달로 큰 도시가 출현했던 송대의 그림 ‘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 1800년대만 하더라도 동아시아 경제는 유럽보다 우월했다고 종속이론가 프랑크는 주장했다.사진제공 이산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존 세계사 해석을 지배한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정면 비판과 새로운 역사적 이론적 지평의 개척이라고 하겠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까지 통념으로 받아들여온 유럽중심적 역사 서술과 사회 이론을 뒤엎으려고’ 하는 것이며, 나아가 ‘글로벌한 관점에서 보면 근세 세계사에서 유럽이 아닌 아시아가 중심 무대를 장악한 것이 명백하다’는 점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의 금과 은을 갖고 나서야 비로소 아시아 중심의 세계 경제 열차의 3등칸에 간신히 승차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인들이 가진 이점이라 해봐야 ‘후진성’의 이점이 전부였다. 그러던 유럽이 19세기에 들어 아시아에서 거대한 ‘카지노’를 벌이게 되고 ‘일시적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여기서 ‘일시적으로’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에는 명백히 동양의 경제력이 언젠가는 다시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알레고리가 담겨 있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와 같은 학자들은 중국 경제의 역사적 중요성을 아낌없이 강조한 바 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에 들어 유럽의 이론가들은 한결같이 서구의 경제 발전을 침소봉대함으로써 유럽중심적인 역사상을 고착시켜왔다.

예컨대 마르크스는 유럽적·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 발전의 보편성을 신봉하면서 이로부터 이탈한 지역을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뭉뚱그리고 나아가 ‘아시아적 전제주의’가 횡행하는 곳으로 낙인찍어 버렸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

베버 역시 유럽 특유의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다른 문명의 종교들과는 달리 합리적인 자본주의 정신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브로델의 경우 아예 유럽이 역사가를 발명해내고 이들로 하여금 유럽 안팎에서 유럽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로 여기서 근대 학문이 ‘동양의 쇠락’과 ‘서구의 발흥’이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일에 주력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프랑크는 세계 경제의 진정한 중심이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였음을, 그리고 아시아가 될 것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반드시 서구 모형을 추종할 필요도 없고 그럴 의무도 없음을 역설한다. 과연 저자는 서구 모형에 따라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겨냥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수여되던 ‘명예 백인’의 지위를 얻었을 뿐이라고 빈정댄다.

그러나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필경 그것을 대신하는 특정한 지역권이나 문명권이 출현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바로 이러한 ‘환상적 중심주의’에 대한 경고야말로 프랑크가 제시하는 으뜸가는 메시지일 것이다.

만일 이런 환상에 빠지게 된다면, 이는 합리적인 유럽만이 ‘예외적으로’ 근대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는 유럽중심주의적 편견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요컨대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유럽을 답습하여 아시아를 위한 아시아의 역사를 인위적으로 발명해내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동아시아 경제의 역동성을 강조했음은 여전히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렇기에 ‘아시아 시대의 글로벌 경제’라는 원서의 부제가 한국어본에서 빠진 게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원제 ReORIENT-Global Eco-nomy in the Asian Age(1998)

이민호 서울대 명예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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