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증권-유통업계 양극화

  • 입력 2003년 2월 13일 19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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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자로 깊게 팬 계곡이 있다. 그런데 그 계곡에 홍수가 나서 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계곡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V자 계곡 양쪽 위로 올라가 물을 피할 것이냐, 아니면 아래쪽에 우두커니 남아있다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 갈 것이냐.

홍수가 났을 때 움직이지 않고 남들과 더불어 낮은 장소에 몰려있으면 급류에 휩쓸리기 쉽다. 그러나 계곡 양쪽 끝으로 올라가면, 즉 남들이 흉내내지 못할 특징 있는 경영을 하면 살아남는다. 이것이 바로 ‘계곡 이론(Valley Theory)’의 요지다.

이는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정립된 이론은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이 이론이 최근 구조조정 시기를 맞은 증권, 유통 등 몇몇 산업에 알려지면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고객에게 매달리거나, 고객과 멀어지거나=외국계 증권사까지 합쳐 무려 57개의 증권사가 난립한 증권업계. 요즘처럼 주가가 떨어진 상황에서 57개 증권사가 모두 이익을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쟁이 워낙 치열한 탓에 시장점유율 10%가 넘는 증권사는 단 한 곳도 없다. 그야말로 고만고만한 증권사가 다닥다닥 붙어 치고받는 경쟁을 하는 셈. 이런 경쟁을 이기지 못해 지난해 건설증권이 사상 최초로 스스로 문을 닫는 일까지 벌어졌다.

업계의 구조조정이 가속화하면 어떤 증권사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두 종류의 회사만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철저히 고객 중심 경영을 하거나, 아니면 고객과 전혀 상관없는 수익구조를 갖추거나.

최근 삼성증권 등 몇몇 증권사가 “고객의 수익률을 높이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선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다른 회사처럼 약정 경쟁에만 신경 쓰다가는 그들과 함께 공멸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오직 고객만을 위한 증권사’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업계 전체의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전략이다.

이와는 정반대 경영을 하는 증권사도 있다. 신영증권과 유화증권은 약정기준 시장점유율이 1%도 안 된다. 그런데 신영증권은 31년 연속 순이익을 냈다. 유화증권도 매년 탄탄한 이익을 낸다.

두 회사는 고객 수나 약정 규모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신영증권은 수수료 수입이 전체 영업이익에 차지하는 비중이 27% 정도밖에 안 된다. 유화증권은 한술 더 떠 수수료 수입 비중이 고작 6%선이다.

대신 두 회사는 수천억원대의 회사 자금을 국공채 등에 투자해 돈을 번다. 증권사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펀드’에 가깝다. 두 회사 모두 고객이 많건 적건 늘 꾸준한 이익을 내는 사업구조를 갖춘 셈이다.

▽비싸고 즐겁거나, 싸고 편하거나=맞벌이부부 증가, 식생활 변화, 교통 발달 등의 변화가 최근 몇 년간 한국 유통시장의 판도를 흔들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특징 있는 두 종류의 업체가 살아남았다. 고급스러운 백화점 및 싸고 편리한 할인점과 홈쇼핑. 대신 수십년 동안 동네 주민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오던 구멍가게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가깝다는 이유로 구멍가게나 슈퍼마켓을 찾지 않는다. 차 타고 20분만 가면 넓은 주차공간을 자랑하는 백화점과 할인점이 있기 때문. 맞벌이부부의 증가로 그때그때 사서 쓰는 사람은 줄어든 반면 주말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쇼핑하는 이들이 늘었다.

그렇다면 유통업체의 경쟁력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아예 싸거나, 아니면 비싸지만 고급스럽거나. 할인점과 홈쇼핑은 저가(低價) 공세로, 백화점은 고급스러운 제품에 지역문화 중심지 역할까지 담당하며 시장점유율을 넓히고 있다. 반면 이렇다 할 특색이 없는 동네 슈퍼마켓과 구멍가게는 매년 수천개씩 줄고 있다.

▽위기일 때 더욱 필요한 특징 경영=업계 전체가 활황일 때는 별 특징이 없어도 돈을 벌 수 있다. 홍수만 안 나면 V자 계곡 아래쪽에 살아도 괜찮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업계 전체에 위기가 시작되면 특징 있는 업체를 빼고는 다 위기에 빠진다. 홍수가 시작되고 계곡에 물이 넘쳐흐르면 계곡 양쪽 끝에 서있는 이들만이 살아남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가치P&C 박정구 사장은 “경쟁이 심한 산업에서는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특징 있는 수익구조를 갖춘 기업이 생존에 유리하다”며 “변화를 거부하고 평범한 사업모델을 유지하는 회사는 산업 구조조정이라는 급류에 휩쓸려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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