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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월 22일 19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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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할 즈음인 스무살은 인생에서 어떤 나이인가. 민태원은 ‘청춘예찬’에서 ‘빛나는 귀중한 이상은 청춘이 누리는 특권’이라고 노래했다. 이상과 뜨거운 피를 가슴에 가득 안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나이에 패자의 멍에를 씌우는 것은 불합리와 비효율의 극치다. 평생 학벌콤플렉스에 시달리게 하는 우리 사회 구조에서는 젊은이들이 명문대라는 사회 권위에 도전하기보다는 좌절감에 빠지거나 쉽게 꿈과 이상을 접을 가능성이 높다.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청춘의 끓는 피를 활용하지 못하면 도대체 어디서 사회의 힘찬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외국에도 명문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명문대 졸업 여부가 개인의 능력을 판단하는 거의 절대적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고 해서 마음 한구석에 성처를 안고 살아가지도 않는다. 편입학시험은 개인의 대학 선택권에 속한 문제지만 그 여파는 대학교육 전반에 주름살을 남긴다. 올해 대학의 편입학 정원은 5만9000명이나 된다. 편입학시험이 끝나고 다시 새 학기가 시작되면 지방대는 강의실이 텅 비어버린다. 지방대생은 수도권과 서울 소재 대학으로, 수도권 소재 대학생들은 서울로 연쇄 이동했기 때문이다. 텅 빈 교실을 바라보는 대학과 교수들이 열심히 학교를 운영하고 가르칠 의욕이 생길 리 없다.
▷하지만 학생을 탓할 수는 없다. 지방대생들은 기업들이 입사원서도 잘 받아주지 않는다지 않는가. 교수들은 또 어떤가. 지방대 교수들은 명문대에 자리가 나면 얼른 보따리 싸서 뒤도 안 돌아보고 서울로 가버린다. 노무현 당선자가 지방대를 육성하겠다고 공약한 것은 바른 방향이지만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지방대를 어디서부터 손을 대서 ‘비옥한 땅’으로 바꿀지 험난한 길임에 분명하다. 그나저나 편입학 경쟁률은 기본이 수십 대 일이라고 하는데 사회적 생존게임의 마지막 패자부활전에서도 탈락한 젊은이들에게는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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