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고별 강연

  • 입력 2002년 12월 18일 18시 21분


‘마지막’ 또는 ‘고별’이라는 어휘는 언제나 쓸쓸하고 아쉬운 느낌을 준다. ‘마지막 잎새’ ‘마지막 수업’ ‘마지막 약속’처럼 ‘마지막’이라는 형용사가 들어간 제목의 영화 소설 대중가요 치고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 한 시대를 대표하던 대학교수들의 고별강연은 인기 운동선수나 스타들의 고별무대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학문적 업적이나 행적과 관련지어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서울대 백낙청(영문학) 정진홍(종교학) 신용하(사회학) 김진균(사회학), 고려대 김우창(영문학), 연세대 김인회(교육학) 허갑범 교수(의대) 등이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난다.

▷내년 2월 퇴임하는 교수들은 대개 일제하에서 태어나 전후 혼란기에 대학에 입학해 4·19와 5·16을 캠퍼스에서 겪었다. 식민지 전쟁 독재 저항으로 점철된 세월을 살아온 지식인들이다. 정진홍 교수는 “졸업 직후 4·19를 맞고 군에 입대해 졸지에 5·16 혁명군의 일원이 됐다”고 말했다. 신용하 교수는 “민족문화를 재발견하고 한국 사회학을 재정립하는 문제의식은 4·19 때문에 생겼다”고 말한다. 백낙청 김진균 교수 등 4·19 세대 교수들은 유신시대와 80년 신군부 집권 이후 학교에서 한때 쫓겨나 거리의 지식인으로 전전한 시절도 있었다.

▷4·19 세대라고 해서 생각과 노선이 꼭 같았던 것은 아니다. 올 1학기 보수 성향 교수의 고별 강연에서는 학생들이 ‘열심히 닭짓한 당신 떠나라’ 등 막말이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여 논란이 일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평생을 대학강단에 바치고 떠나는 스승의 고별강연에서 소란을 피운 것은 누가 옳고 그르냐는 논쟁을 떠나 아름답게 비치지 않는다. 존재의 다양성, 사고와 의견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 가치이다.

▷한국 교수들은 호적상 65세가 되면 자동적으로 학교를 떠나야 하지만 육체와 정신의 건강은 개인차가 심하다. 70대가 돼서도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과 기억력을 갖춘 노인이 있는가 하면 호적의 정년이 되기 전에 기력이 현저하게 쇠락하는 지식 근로자들도 있다. 구미 대학에서 법적으로 정년을 제한하는 것은 연령차별(Age Discrimination)로 치부된다. 육체와 정신이 연구와 강의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스스로 교단을 떠나기 때문에 70대 교수가 흔하다. 이번 학기에 고별강연을 마친 교수들이 비록 강단을 떠나더라도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사회를 향해 지성의 목소리를 계속 내주기를 기대한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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