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눈]장영수/국민 속이는 ´대선空約´

  • 입력 2002년 12월 11일 18시 22분


대통령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서 후보들의 공약이 눈길을 끌고 있다. 모든 후보들이 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인식한 듯 부정부패가 없는 깨끗한 정치를 통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심지어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비리에 연루되면 즉각 물러나겠다는 신문광고까지 나오고 있다. 공약대로라면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차기 정부에서는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가 될 것만 같다.

▼실현가능성-능력 살펴봐야▼

그러나 그동안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끝나버린 예가 너무도 많았다. 대선 때마다 제시되었던 각종 선거 공약들이 모두 지켜졌다면, 이미 대한민국은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지상천국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이 공약을 지킬 의도가 없었는지 아니면 공약을 실현할 능력이 부족했는지, 수많은 공약이 지켜지지 못한 채 다음 선거에 또다시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후보들의 선거 공약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후보들이 내거는 화려한 미래, 달콤한 약속을 소박하게 믿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선거 공약의 진실성을 따져 봄으로써 후보에 대해 좀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다. 후보들이 정작 당선된 이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공약을 지키지 않는 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선 공약의 장밋빛 청사진보다는 구체적 실현 가능성과 실현 능력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공약을 쉽게 남발하는 경우에는 후보의 성실성을 먼저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국민의 환심을 사서 일단 당선되고 보자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집권 이후의 태도변화를 예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공약(空約)으로 국민을 현혹할 수 있다는 생각의 바탕에는 국민을 무시하는 시각이 은연중 깔려 있다고 의심할 수 있다.

또한 객관적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과연 그 후보가 그 공약을 제대로 실현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도 함께 평가해야 할 것이다. 민주국가의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는 자리가 결코 아니다. 민주적 리더십을 통해 국민의 의사와 힘을 모아 중요한 국가사무를 처리하는 것이 민주적 대통령의 과제다. 그런 대통령의 위치와 역할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후보가 과연 민주적 대통령이 될 것인지도 의심해 볼 일이다.

대통령은 말 그대로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국민 의사를 존중하는 가운데 국민의 이익에 부합되도록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 따라서 국민의 신뢰 없이 대통령이 직무를 올바르게 수행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기 전에 내건 선거 공약부터 지키지 못한다면, 그러한 대통령이 어떻게 민주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비록 후보의 선거 공약에 대해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는 것은 곤란하다 할지라도, 국민의 대표로서 국민과의 약속을 소홀히 한다면 국민이 어떻게 그를, 그가 속한 정당을, 나아가 대한민국 정치인들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공약남발 후보 심판해야▼

공약(公約)은 말 그대로 공적인 약속이다. 선거 공약도 그것이 막연한 구호나 비현실적인 희망사항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약속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약을 지키려는 노력을 통해 그 약속에 무게를 실어야 한다.

만일 정치인들이 앞뒤 없이 일단 집권하고 보자는 식의 발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래서 국민을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기만할 생각까지 갖고 있다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미 1960년의 4·19혁명과 1987년의 6월 항쟁, 그리고 최근의 월드컵 축구와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성숙된 시민의식은 이미 정치권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정치인들이 국민의 분노를 자극하는 뇌관을 건드릴 경우, 그 결과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장영수 고려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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