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영음/'익명' 뒤에 숨은 독설폭력

  • 입력 2002년 12월 9일 18시 36분


인터넷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매체다. 인터넷이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1989년 중국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현장에 있던 중국 학생들의 경험담을 생생하게 담은 글들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사건이었다. 중국 기존 언론들의 입에 재갈이 물렸던 당시, 중국의 시민들은 서방 언론들과의 제한된 인터뷰보다도 더욱 생생하게 인터넷을 통해 당시의 참혹상을 알릴 수 있었다.

▼정보화사회 인터넷의 두 얼굴▼

이후에도 인터넷은 기존 언론에서는 많이 다루어지지 않은 시민의 목소리를 알리는 한편 시민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92년 걸프전 당시에는 미국이 이라크 민간시설을 폭파했을 때 이라크측 민간인의 피해상황 등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96년 미국의 새로운 방송법이 제정됐을 때 관심 있는 미 국민은 온라인 토론을 통해 적극 정보를 교환했고 필요한 로비활동이나 서명운동, 전자우편 보내기 운동 등을 전개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일반 시민들은 기존 언론에서는 얻기 힘든 발언의 기회를 갖는다. 이러한 기회는 소위 ‘인터넷 언론’이라 불리는 사이트에서뿐만 아니라 인터넷의 수많은 게시판을 통해서도 주어진다. 이 같은 인터넷 토론 문화는 1980년대 후반부터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해 새로운 형태의 ‘공공 담론의 장’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껏 모았다.

이처럼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의견을 전 세계에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인터넷은 그야말로 기존 언론의 장벽을 뛰어넘어 소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로 각광받았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은 억압이 통하지 않는 자유스러운 공간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인터넷을 통한 공공 담론의 형성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미래와도 필수 불가결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인터넷이 진정한 공공 담론의 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사용자들의 권리의식뿐만 아니라 책임의식이 요구된다. 이는 특히 인터넷에 올려지는 글이 필자의 이름이나 정보의 출처가 밝혀지지 않은 익명의 글이기 때문에 더욱 강조되는 측면이다.

익명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익명성이 토론을 활성화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는 연구 결과가 말해주듯이, 사이버 공간에서는 정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평상시 보여줄 수 없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 하지만 익명성을 방패삼아 거짓 정보를 유포한다거나 지나치게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터넷 문화를 더럽히고 담론 형성의 장으로서 인터넷의 가치를 폭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인터넷의 익명성을 이용한 언어폭력은 인터넷이 공공 담론의 장으로서 도약할 무렵인 90년대 초 미국에서도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연구에 의하면 사이버 공간에서 토론을 할 때 사람들은 평소 사용하지 않는 과격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것을 ‘성난 메시지(flaming)’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했다.

▼표현자유 걸맞은 책임의식을▼

이런 점에서 최근 MBC 토론에 참여했던 한 여교수에 대해 사이버상에서 심한 비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인터넷 담론의 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심히 우려된다. 인터넷상에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다거나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은 분명한 사용자의 권리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때는 어떤 논리적 근거나 내용을 중심으로 해야만 더욱 값어치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토론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치우치거나 인신공격으로 흐른다면 공공 담론의 장을 위축시킬 것이다.

특히 내용이 익명으로 전달되는 것이라면 더더욱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익명 문화는 그 사회 국민의 수준을 말해준다고도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번 선거에서는 대규모 유세보다 미디어상에서의 토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만큼, 인터넷 이용자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광장’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이영음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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