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2002 D-9]양당 '황당한 공약' 공방

  • 입력 2002년 12월 9일 18시 17분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부동표를 흡수하기 위한 선심성 공약 경쟁뿐 아니라 서로 상대 당 공약을 두고 실현가능성이 없는 ‘공약(空約)’이라고 매도하는 네거티브 캠페인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한나라당〓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 공약을 비현실적 공약사례 1순위로 꼽았다. 인구 50만∼70만 신도시로 상정해도 재정이 30조∼40조원은 들어갈 게 분명한데 노 후보는 행정수도 이전비용을 초기에 1조7000억원으로 잡았다가 다시 6조∼7조원으로 늘리는 등 스스로 졸속공약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노 후보측은 “비용은 최대 5조원이면 충분하며 이 비용도 나중에 기존 청사 매각대금을 회수하면 더 줄일 수 있다”고 반박했다.

한나라당은 또 “7월 말 전경련 토론 때만 해도 연 5%대 안정적인 성장을 주장한 노 후보가 9월 말 공약발표 때는 연평균 7%로 높였다”며 “분배를 중시하면서 연 7% 성장을 자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 후보측은 “지역통합과 정치개혁, 여성 일자리 창출이 전제되면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심재철(沈在哲) 제3정조위원장은 또 노 후보의 ‘5세 이하 유아 보육비 절반 국가 부담’ 공약에 대해서도 “정부 부담이 1조5500억원이나 돼 우리 당도 고려했다가 포기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한나라당이 교육재정을 국내총생산(GDP)의 7%로 끌어올리겠다는 데 대해 민주당 측은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는 실현 불가능한 공약이라고 주장했다. 교육재정을 이처럼 늘리려면 산술적으로 매년 9조원씩, 2007년까지 총 45조원의 예산이 더 투입돼야 한다는 것.

이에 한나라당측은 “예산의 우선 순위를 교육에 집중하면 된다”고 반박했다.

신규 일자리 창출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공히 매년 50만개씩 임기 중 250만개 창출을 공약으로 제시했지만, 민주당측은 “연 7% 성장을 전제로 하면 250만개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지만 한나라당처럼 연 6% 경제성장 하에서는 기껏해야 200만개 창출에 그칠 것”이라며 한나라당의 공약근거 자체를 의심했다.

군 복무기간 단축 공약에 대해서도 민주당 배기찬 후보 정책 보좌역은 “군 복무기간을 줄이려면 남북화해 협력정책이 선행돼야 하는데 한나라당처럼 대북 강경책을 쓰면 하루도 단축하기 어렵다”고 비난했다. 이외에도 한나라당 공약 중 △5년간 주택 230만채를 보급해 주택보급률을 110%로 올리고 △중고교생과 재수생 학원수강료 소득공제 방안 등도 ‘이상(理想)’일 뿐이라는 것이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공약 표절" 치열한 열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상대당의 인기 공약을 서로 차용하는 현상은 선진국의 건전한 정책 수렴화 과정과 겉모습은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적으론 ‘무분별한 베끼기 경쟁’에 가깝다. 정치권 스스로 9일 “왜 우리 당 공약을 베끼느냐”며 치열한 상호 비방전을 벌였다.

민주당이 8일 발표한 ‘군 복무기간 4개월 단축’ 공약에 대해 한나라당은 ‘뻔뻔한 베끼기’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나라당이 9월20일 “군 복무기간을 현행 26개월에서 24개월로 2개월 단축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민주당은 “수천억원 예산의 추가 소요 문제와 군 인력 자원의 감소 추세 등을 감안할 때 현실성이 없다”며 일축했다.

그러나 복무기간 단축이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20대 남자 유권자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자 민주당은 8일 오전 긴급회의를 갖고 4개월 단축 방안을 확정했다. 천용택(千容宅) 선대위 국방안보특별위원장은 “나는 ‘6개월 단축’을 주장했는데 ‘그러면 민주당의 안보 의식이 흐릿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는 반론이 있어 내가 물러섰다”고 말해 이 공약이 급조됐음을 사실상 시인했다.

또 장영달(張永達) 국회 국방위원장이 “군 진급 심사위원회에 민간인 출신의 국방 전문가를 파견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천 위원장이 “70만 군을 모독하는 얘기다”며 공개적으로 반박, 혼란을 빚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이 밖에도 자신들이 ‘경로 연금을 현행 5만원에서 7만∼8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하자 민주당이 ‘10만원 인상’으로 따라왔으며, ‘중소기업 법인세 최저 세율(현행 12%)을 내리겠다’고 공약한 것도 민주당이 차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베끼기 원조’는 한나라당”이라고 반박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최근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촉구하고,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만나겠다”고 말하는 등 한미관계와 대북정책에 있어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노무현(盧武鉉) 후보 따라하기’라는 게 민주당의 주장이다.

민주당은 또 “노 후보의 ‘충청권 행정수도 건설’이 충청 민심을 사로잡자 이 후보는 ‘과학기술 수도 건설’을 내세우며 따라왔고, 호주제 폐지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노 후보에게 여성표를 뺏길 것을 우려해 ‘임기 내 폐지’로 돌아섰다”고 주장했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정책베끼기 전문가 의견▼

▽정진민(鄭鎭民·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선진국은 정책이 수렴되면서도 정당간 차별성이 유지된다. 2000년 미국 대선 때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세금 감면 정책을 주장했지만 감세 대상과 폭, 세목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인기 정책을 서로 베끼면서 표 있는 곳으로 몰려다니는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양당 모두 분명한 철학이나 원칙이 없기 때문이다. 정책 선거를 하자는 것은 정책적 차별성을 드러내 유권자의 선택을 도와주자는 것이다. 양당의 정책 베끼기는 유권자를 더욱 혼란시켜 정책이 아닌 다른 요소로 투표하도록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강원택(康元澤·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양당 정책의 수렴화 현상은 이슈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져 가는 과정이란 점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과거 냉전시대라면 군 복무 단축 정책을 양당이 경쟁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정치 개혁이나 국정원 개편 같은 것도 정당의 이념적 차이와 상관없이 추진할 수 있는 사안이다. 이처럼 수렴된 이슈는 누가 집권하든 차기 정부의 중요한 국정 과제가 된다. 단 정책 수렴 과정이 ‘무분별한 베끼기’가 되지 않으려면 각 당의 기존 정책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고, 실현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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