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LG필립스LCD 경영실험

  • 입력 2002년 10월 28일 19시 41분


경북 구미시의 LG필립스LCD 총무환경담당 김동찬 상무(가운데)가 부하사원들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사진과 이름, 인적사항 등을 붙여 놓은 사무실의 이름판 앞에서 직원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구미〓박중현기자
경북 구미시의 LG필립스LCD 총무환경담당 김동찬 상무(가운데)가 부하사원들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사진과 이름, 인적사항 등을 붙여 놓은 사무실의 이름판 앞에서 직원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구미〓박중현기자

한때 ‘인화(人和)의 LG’ ‘관리의 삼성’ ‘뚝심의 현대’처럼 대기업별로 특유의 ‘업무 스타일’을 표현하던 말이 유행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체로 한국 기업들의 조직문화에 개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특히 외환위기 후 성과 중심의 서구식 경영이 급속히 정착되면서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 있던 ‘한국형 조직문화’가 사라져 버렸다는 의견이다.

이런 가운데 새로운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한 실험에 전력을 쏟는 첨단기술형 기업이 있다. 모니터용 초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LCD) 분야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인 LG필립스LCD가 그 주인공.

▽기업은 커 가는데 사람이 흔들린다〓LG필립스LCD의 조직문화 실험의 시발은 작년 7월. 조직문화팀은 회사에 대한 직원들의 신뢰와 긍지, 회사생활의 즐거움 등에 ‘낙제점’을 줬다. 또 ‘조직문화의 부재(不在)’를 이 같은 사태의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꼽았다. 또 5700여명 구성원의 3분의 2가 입사 3년차 이하로 회사에 대한 애착이 약하다는 점도 지적됐다.

구본준(具本俊) 사장은 이 보고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조직문화 혁신방안이 ‘1M1C’. ‘넘버 원 멤버스, 넘버 원 컴퍼니’의 약자로 1등 인재들이 즐겁게 일하면서 기업을 1등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아래의 요구로 위부터 바뀐다〓‘1M1C’가 구체화된 것은 올 3월말. 구 사장과 경영진, 노조위원장 등 29명은 전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자기변화 선언서’를 읽었다.

“꾸중보다 칭찬과 격려를 자주 하겠다”(구 사장) “월 1회 평생 갈고 닦아온 영업비법을 부하직원에게 전수하겠다”(구덕모 영업부문 부사장) “최신 유행가 하나를 배우겠다”(여상덕 모니터, TV개발 담당 상무) 등 다양한 내용이 선언서에 담겼다.

간부 1명에 4, 5개 항목으로 압축된 자기변화 선언의 내용은 직속 부하 직원들의 실제 요구안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 LG필립스LCD의 조직문화 태스크포스팀은 6개월이 지난 뒤 서울 구미 안양 등지에 흩어져 있는 사업장을 불시에 방문해 “임원들이 약속을 지키고 있는가”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이고 직원들을 인터뷰했다.

직원들의 요구안을 반영해 간부들에게 부하직원 이름 외우기도 ‘강제’로 주문했다. 한 달의 ‘시험 준비 기간’을 거쳐 5월 열렸던 ‘부하사원 이름 외우기’ 대회에서 간부들은 3분 동안 무작위로 추출된 50명 사원의 얼굴을 보고 이름을 맞히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또 퇴근시간이 너무 늦다는 직원들의 불만을 수용, 이르면 다음달부터 직원들이 일주일에 하루를 ‘넘버 원 데이’로 정하도록 하고 이날만큼은 어느 누구도 ‘칼 퇴근’을 방해하지 않도록 할 예정이다.

간부진의 부담감은 엄청나게 불어났다. “선언 실행을 위해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구미 내의 3개 사업장을 돌며 90% 이상의 결재를 현장에서 한다. 단어장을 들고 다니며 부하직원의 이름을 외우고 하루 1, 2명의 부하직원과 개인면담을 한다.” 부하 직원들의 높은 평가를 받아 ‘넘버 원 리더’로 뽑힌 총무환경담당 김동찬(金東贊) 상무의 얘기.

반대로 최악의 평가를 받은 간부는 ‘리더’가 아닌 보직으로 옮겨가거나 회사를 떠나기도 했다. 이 회사는 이르면 조만간 자기변화선언 대상을 팀장(부장 또는 차장)급 100여명으로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화합의 시너지와 조직문화 개선〓간부들의 ‘악전고투’에 부하 직원들은 꽃다발로 화답했다. 대리급 이하 사원들의 모임인 ‘프레시 보드’는 5월 스승의 날에 맞춰 전 간부진의 집에 케이크와 감사의 카드를 보냈다.

경북 구미시에 있는 LCD 2공장 혁신팀의 안경곤(安炅坤·30) 사원은 “올해 초부터 사원들은 회사가 무척 노력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고 이전에는 얼굴만 알던 상사에게 언제든지 업무 문제로 건의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신뢰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조직문화의 개선이 ‘조직역량’의 강화로도 이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LG그룹 구조조정본부가 매년 실시하는 ‘조직역량 지수’에서 2000년에 비해 2001년 리더십 등 여러 항목이 악화됐던 LG필립스LCD는 2002년에 전년 대비 획기적인 개선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됐다.

작년 49.2점이던 종합지수는 1년 만에 52.6점으로 뛰어올랐다. 특히 최고경영자(CEO)의 리더십 평점은 55.7점에서 61.3점으로, 임원들의 리더십은 54.8점에서 59.6점, 조직의 신속성은 44.2점에서 50.3점 등으로 각각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LG필립스LCD 조직문화태스크팀 최순철(崔純喆) 과장은 “전체 직원의 평균 연령이 26.9세로 다른 기업보다 젊어 변화에 대한 적응이 빠르다는 점, CEO의 강력한 의지 등이 급격한 조직문화실험을 벌일 수 있는 토양이 됐다”면서 “그러나 아직도 실험은 시작 단계일 뿐”이라고 진단했다.

LG필립스LCD의 조직역량 변화 (100점 만점)
2000년2001년2002년
종합지수 46.7 49.2 52.6
사업전략의 방향성 60.5 61.2 68.4
사업전략의 실천성 53.8 53.1 62.5
CEO의 리더십 58.8 55.7 61.3
임원의 리더십 55.5 54.8 59.6
인재중시 철학 43.8 44.7 46.3
조직운영의 신속성 42.5 44.2 50.3
커뮤니케이션 능력 42.8 44.2 45.1
조직의 혁신성 38.4 42.0 42.7
조직의 유연성 37.3 38.4 40.7
자료:LG그룹 구조조정본부

구미〓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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