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승호/이근영·박상배씨 퇴진부터

  • 입력 2002년 10월 20일 18시 45분


#국면1

(2000년 6월 하순 산업은행)

“이사님, 현대상선의 당좌대월 4000억원이 만기가 돌아왔습니다.”(산은 대출담당 실무자)

“연장하세요.”(산은 박상배 이사)

“만기연장은 이사전결 사항이 아닙니다. 신용위원회(의장 산은 부총재)에 올려야 합니다.”

“내가 전결처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대상선에 ‘만기일에 돈을 융통해 잠깐 갚아라’ 하는 겁니다. 갚는 즉시 별개의 신규대출이 일어나는 것처럼 꾸미는 거지요.”

“음, 그렇게 하세요.”

(며칠후인 6월30일)

“현대상선이 3000억원만 갚았습니다. 나머지는 상환이 불가능합니다.”(실무자)

“돈이 들어온 것처럼 처리해요.”(박 이사)

“그러면 ‘무자원 입금표기’로 규정위반입니다. 신용위에 올려 만기연장하는 게 어떨까요.”

“시키는 대로 하세요.”

이상은 기자가 써본 픽션이다. 그러나 상상만으로 지어낸 작문이 아니다. 이를 강력히 뒷받침하는 중요한 사실들이 새로 드러났다. 확인된 사실은 이렇다.

①신규대출은 임원전결할 수 있지만 만기연장은 신용위를 통과해야 한다. ②산은이 현대상선에 당좌대월한 4000억원의 만기가 6월30일 돌아오자 자금난에 시달리던 현대상선은 어디서 구했는지 3000억원을 갚았다. ③그러나 산은은 4000억원 전액상환한 것으로 장부를 꾸몄다. ④이를 근거로 만기연장이 아닌 신규대출을 일으켰다.

어떤가. 그래도 픽션 같은가.

#국면2

산은의 4000억원 대출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은행이 조직적으로 자행한 위규(違規)대출’임이 확인된 것. ‘대출결정에는 문제가 없으며 실무자의 절차적 실수가 있었을 뿐’이라는 지금까지의 산은 해명은 근거를 잃게 됐다.

산은이 장부조작이라는 무리수를 둬가면서 임원전결을 선택한 사연은 무엇일까.

대출안건을 공론화하지 못할 만큼 설득력이 없었거나, 내부임원들에게도 보안이 필요한 ‘비밀대출’이었을 것이라고 금융계는 보고 있다. 4000억원 대출은 한나라당이 대북 송금됐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돈이다. 더욱 섬뜩한 일은 북한이 그동안의 주장과는 달리 핵개발을 해왔다는 점. 어찌 알겠는가. 이 돈이 핵개발에도 도움이 됐을지….

#관련 법규이해할 수 없는 산은 일처리의 배경을 밝히려면 그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추적하는 수밖에 없다.

관련 법조문을 찾아보자.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제4조.금융기관에 종사하는 자는…금융거래의 내용에 대한 정보를 누설해서는 아니 되며, …다만 다음에 해당하는 경우 그러하지 아니하다.

1.2.3.… 4.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원장…이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검사를 위하여 필요로 하는 거래정보 등의 제공

가.… 나.고객예금횡령·무자원 입금표기 후 현금인출 등 금융사고의 적출에 필요한 경우….” 이런 경우 계좌추적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을 요구해야 할 사람은 금감위원장이라고 법은 쓰고있다.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뭐라 했을까. “실명제법은 계좌추적권을 발동할 수 있는 경우를 구체적으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당좌대월한 자금의 용도를 파악하기 위해 계좌추적권을 발동할 수는 없다.”(2002년 10월 4일 정무위 국감에서)

금감위원장은 법을 모르고 한 얘기일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법을 어기겠다는 뜻일까.

#결론

2000년 6월 당시 대출 결정라인인 ‘이근영 산은 총재-박상배 이사’는 현재 ‘금감위원장-산은 부총재’ 자리에 앉아 있다. 진실을 밝혀야 할 자리에 엉뚱하게도 조사받아야 할 사람들이 앉아 이해할 수 없는 언설로 사건을 덮고 변명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을 밝히려면 선행돼야 할 일이 있다. 이 위원장과 박 부총재를 그 자리에서 퇴진시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진실규명은 불가능하며,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사람들이 안 믿는다.

허승호 경제부 차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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