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152…1929년 12월 24일 (3)

  • 입력 2002년 10월 20일 17시 35분


북풍은 조선 사람의 집이든 일본 사람의 집이든 가리지 않고 문을 두드리지만 불러들이지 않기에 우풍이 되어 파고들었다가 추위를 퍼뜨릴 새도 없이 다른 집 문으로 달려간다.

어떤 집에서는 툇마루에 자리를 깔고, 거의 앞도 보이지 않는 노파가 새끼줄에 무를 엮고 있다.

손놀림이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무 사다리가 하나, 둘, 셋, 처마 밑에 매달아 무말랭이를 만드는 것이다. 노파 옆에서는 빨간 누비옷을 입은 손녀가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실뜨기 놀이를 하고 있다.

산, 강, 논, 말의 눈, 장구, 배, 다시 산으로 돌아갔을 때, 휭-휭-, 바람은 실뜨기의 끈을 흔들고, 휭-휭-.

어떤 집에서는 동네 남녀가 열 사람 정도 모여 삶은 감자를 먹으면서 막걸리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면서 짚신과 바구니와 가마니를 짜고 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밖으로 뛰쳐나온 바람이 휭-휭- 목 쉰 소리를 내며 노래하자 길 가던 사람들은 복종의 눈빛을 띠고 등을 구부리고 어깨를 움츠리는 무력한 몸짓을 거듭하고, 마른풀은 미친 듯 격렬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뒤를 돌아보곤 했다.

어떤 집에서는 젊은 남편과 아내와 마주 앉아, 남편은 새끼줄을 꼬고 아내는 바느질을 했다.

또 어떤 집에서는 열 살과 아홉 살 짜리 자매가 화롯불을 쬐며 콩주머니 놀이를 하고 있다.

콩주머니 속에는 볶은 콩과 메뚜기①가 세 개 들어 있다. 구슬을 사 달라고 졸랐지만 사주지 않아서 엄마의 낡은 버선을 잘라 달라고 했다.

카랑 카랑 카랑, 메뚜기는 콩과 부딪치며 깨진 구슬 같은 소리를 낸다. 카랑 카랑 카랑, 한 개 한 개 가져간다, 카랑, 두 개 두 개 가져간다, 카랑, 제일 큰 주머니를 놓친 언니는 콩주머니의 끈을 풀어 안에서 콩을 꺼내 입에 던져 넣었다. 못됐다, 언니.

못됐기는, 떨어뜨린 사람이 먹으면 되는 기지. 그럼 나도 떨어뜨린다. 카랑 카랑 카랑, 한 개 한 개 가져간다, 카랑, 못 됐다, 일부러 그랬재!

①탕건이나 책갑에 달아 물건이 벗겨지지 않도록 하는 기구. 흔히 뿔을 깎아 만든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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