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4억달러의 비밀

  • 입력 2002년 10월 4일 18시 19분


어느 은행 지점장을 찾아가 물어보았다.

-4000억원이나 되는 엄청난 돈을 특정기업에 긴급대출 해주는데 은행 담당이사가 총재에게 구두보고만 하고 전결처리할 수 있나.

“당좌대월이 영업본부장 전결사항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큰돈을 총재에게 구두보고만 하고 내줬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산업은행의 현대상선 거액 지원을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데 그럴 수 있나.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아는 게 상식적이다.”

-현대상선은 2000년 반기(半期) 보고서에 당좌대월한 4000억원 중 1000억원만 차입금으로 잡았는데 그럴 수 있나.

“당좌대월은 마이너스 통장 같은 것으로 약정금액 내에서 쪼개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보고서에는 약정금액 총액을 부기(附記)한다.”

▼이 말 다르고 저 말 다르니▼

-산은은 현대상선이 4000억원을 일시에 인출했다고 하고 현대상선은 1000억원만 쓰고 3000억원은 나중에 사용했다고 했는데….

“한꺼번에 인출한 돈을 나중에 썼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필요할 때 빼쓸 수 있는데 비싼 금리의 당좌대월을 미리 뽑아놓고 묵힐 리 있나.”

산은이 2000년 6월 현대상선에 긴급대출한 4900억원(4억 달러·6월7일 4000억원+ 6월28일 900억원)은 이렇듯 처음부터 의혹투성이이다. 한나라당은 이 돈이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북한에 ‘뒷돈’으로 비밀송금됐다고 주장하고 정부와 산은, 현대상선은 일제히 아니라고 펄쩍 뛴다. 아니라면 돈이 쓰인 곳을 명확히 밝히면 될 일인데 그러기는커녕 이 말 다르고 저 말 달라 이제는 어느 말도 믿기 어렵게 돼버렸다.

산은은 현대상선에 거액대출 한 것을 주거래은행에 통보했다고 하고 외환은행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한다. 산은은 당시 현대상선이 심각한 자금위기를 맞고 있었다고 하는데 반해 그 무렵 금감위 위원장은 유동성에 별 문제가 없다고 했다. 현대상선은 처음에 1000억원만 썼다고 했다가 뒤에는 4000억원 중 3000억원은 6월29일에 갚았다가 다음날 다시 대출받았다고 말을 바꾸더니 그 뒤로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국가경제를 생각해 현대상선에 거액대출을 결정했다는 산은측의 말도 믿기 어렵다. 은행이 사용처도 불분명한 거액을 국가경제를 염려해 선뜻 내놓는 곳이던가. 자금압박에 시달려 긴급대출을 받았다는 현대상선은 대출을 받기 전 현대아산에 560억원을 지원했는가 하면 대출을 받은 직후에는 현대건설 기업어음(CP) 1400억원어치를 매입했다고 한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마침내 현대상선이 산은으로부터 지원 받은 4000억원의 대출승인 신청서가 조작됐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서류에 당시 현대상선 김충식 사장의 서명이 없고 직인도 틀리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산은과 현대상선측이 김 사장도 모르게 가짜 서류를 작성했다는 것인데 서류부터 가짜여서는 대출금의 사용처 역시 가짜일 개연성이 높다.

‘대북 비밀 송금설’이 나오고 열흘이 지나면서 돈의 행방이 북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흐름이다. 정몽헌 회장이 계열사 지분을 확대하는데 그 돈이 쓰였을 것이란 얘기다. 정회장측 계열사들이 ‘왕자의 난’ 이후 계열사 주식 매입대금으로 4000여억원을 투입했다는 것으로 금액도 얼추 맞는 듯은 싶다.

▼지긋지긋한 ´거짓말 행진´▼

그러나 이렇게 짜맞추려 해서는 김 전 현대상선사장이 엄낙용 전 산은총재에게 “이 돈은 우리가 쓴 게 아니어서 갚을 수 없다”고 한 말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계열사에 써놓고 정부보고 갚으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엄 전 총재는 이 문제를 당시 이기호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게 보고했고 김보현 국정원 3차장에게도 말했는데 모두 “걱정말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정몽헌 계열사 지분확대설’과는 전혀 아귀가 맞지 않는 소리다.

이제 ‘4억달러의 비밀’을 풀려면 계좌추적으로 돈의 사용처를 밝힐 수밖에 없다. 현대상선이 분석회계를 한 것이 드러나고 대출서류 조작 의혹까지 제기됐는데도 정부가 금융실명제법을 앞세워 계좌추적을 할 수 없다고 버티는 것은 군색하기 짝이 없다. 당장 계좌추적에 나서 뭉칫돈의 행방을 밝혀야 한다. ‘거짓말 행진’은 너무너무 지겹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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