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민심, 이렇게 읽어라

  • 입력 2002년 9월 25일 18시 50분


추석민심을 둘러본 각 정파는 속으로 뜨끔했을 것이다. 대통령선거를 한다면서 지금 벌이고 있는 선거판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았으니 말이다. 허구한 날 안팎으로 당쟁이나 정쟁에 코를 박고 있으니 한마디로 이것이 무슨 대통령선거냐는 것이다. 지금 같은 지경에서 새 대통령이 나온다 한들 무슨 뾰족한 기대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 민심 아니던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 16대 대통령선거는 자칫 최악의 감정싸움이 될 것 같아 으스스하다. 사실상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유난히 긴 선거기간 내내 상대방 때리기가 계속된 선거정국이 일찍이 없었다. 특히 통상의 비판 수준을 넘어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는 단계까지 이른 것은 심각하다. 이번처럼 핏발이 섰던 선거분위기도 별로 기억이 없다.

▼감정의 골 심각한 수준▼

이 와중에서 정당이미지도 흐려지고 대통령후보들도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본인이 자초했건, 상대방이 뒤집어씌웠건 당쟁과 정쟁에서 튄 흙탕물로 후보들도 볼썽사납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아들 병역면제 의혹의 수렁에 아직 빠져 있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왔다갔다하는 언동으로 불안한 이미지를 아직 못 벗어나고 있으며, 정당 공천 없이 불쑥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 후보는 무소속으로 나설 것이 아니라면 무슨 당 후보인지 아직은 미지수 투성이라는 것이다(실상이 그렇다면 선거전을 지금처럼 주도해 온 정치세력은 기선을 잡았다는 점에서 성공한 셈이다).

좋다. 현실정치란 갖가지 정략과 묘책이 얽히고설켜 진행된다는 점은 인정하자. 그런데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잘못을 범하는 것은 별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떤 후보가 무슨 정책을 내놓은들 귀기울일 유권자가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 문제다. 결국 모두를 신뢰하지 않게 되는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다. 가볍게 볼 수 없는 정치위기 같다.

지금은 촌각을 다투는 변화 속에서 매일 세계와 겨루어야 하는 절박한 시점이라고 해왔다. 살아남기 위한 국가 경쟁력이 절실하고, 또 이를 지향하는 정치지도자의 통찰력과 정열, 그리고 정책검증이 필수적이라고 수없이 말해 왔다. 그런데 정작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판은 그게 아니다. 정치판의 싸움을 보노라면 정책대결이란 말조차 꺼내기가 부끄럽다. 지금쯤은 정당별 국정청사진이 나올 때가 됐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 정책검증은 물 건너가는 것인가. 자칫 국가미래 설계논의가 유실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설령 후에 전(廛)을 벌인다 해도 그리 유권자의 관심을 끌지는 못 할 것 같다. 그보다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부관참시(剖棺斬屍)식 족보전쟁이 이미 시작됐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이미 이회창 후보 부친을 일제강점기 때 전력을 거론하며 공식적으로 겨냥했으니 앞으로 이런 불똥이 어느 후보까지 번져 나갈지 모를 일이다. 부모들 이야기가 이번처럼 도마에 오른 선거가 별로 없었다. 대통령을 뽑자는 선거인가, 후보 부모들 검증하자는 선거인가. 서독의 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사생아였고,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4명의 남자와 5번 결혼한 여자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한 정치지도자가 아니었다.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이 대통령선거는 지금처럼 해야 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어디 대답해 보라.

대통령선거가 필살의 혈투로 더 크게 얼룩져 가고 있는데도 후보들은 입만 열면 ‘국민통합’이고, ‘이민 가겠다’는 증오의 뿌리가 더 깊이 내려가고 있는데도 ‘국민통합’이다. 이런 판을 만들어 놓고 나서 도대체 무슨 수로 통합하겠다는 것인가. 반드시 정치보복을 하겠다고 하지 않을 양이면 통합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것이 낫다. 한국 정치에서 증오는 이미 심각한 지경을 넘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선거가 끝난 뒤라도 어차피 함께 살아가야 할 상대라면 껄끄러운 경쟁자일지언정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적은 아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섬뜩섬뜩한 언동은 그게 아니다. 대물림해 온 증오뿐만 아니라 새로운 증오의 씨까지 뿌리고 있으니 어쩌자는 것인가. ‘증오후유증’ 때문에 국가적 뒷걸음질도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았는가. 그만 했으면 이제 됐다.

▼누가 먼저 ´마음´열건가▼

정파는 ‘험담만 뱉어내는 토호 집단’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민심이다. 설사 상대방 공격이 근거 없는 비방이라 하더라도, 떳떳하다면 억울하다 소리치며 맞받아 치지 말고 고개를 돌려라. 분명 신선한 바람이 될 것이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부닥치지 않으면 소리도 나지 않는 법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금도(襟度)의 정치를 잃어 버렸다. 지금이 그것을 되찾을 기회다. 그런 마음이어야 통합이야기도 꺼낼 수 있다. 물귀신 선거전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차별화 전략이 따로 있지 않다. 민심은 그런 정당, 그런 후보를 보고 싶어한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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