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주도(酒道)

  • 입력 2002년 9월 4일 18시 31분


고은 시인이 ‘최근의 시가 가슴에서 터져 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 나오는 것은 술꾼 시인이 줄어든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일갈했다. 고 시인 특유의 수사법을 빌리면 술은 일상을 깨고 나와 직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액체이다. 이백(李白) 등 인류사에 남은 대시인들은 술을 즐기며 술과 관련한 위대한 문학을 많이 남겼다. 술을 좋아하는 원로 시인의 말이라고는 하지만 ‘술에 취해야 가슴으로 시를 쓴다’는 주장에 100% 동의하기는 어렵다. 뛰어난 예술가들이 술로 몸을 망가뜨리는 바람에 천재의 싹만 틔워 놓고 요절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인이자 정치인인 남재희씨는 변영로 시인의 ‘명정(酩酊) 40년’에 비견할 수 있는 ‘문주(文酒) 40년’을 ‘강서문학’과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연재해 인기를 끌었다. 남씨는 ‘문주 40년’에서 볼보와 코냑, 베토벤과 여인을 사랑했던 소설가 이병주씨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이병주씨는 예쁜 마담이 있는 양주집에서 코냑 마시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소설을 대량 생산했다. 남씨는 ‘그만한 체험의 양과 박학다식한 지식을 지닌 소설가를 만나지 못했으나 코냑 비용을 대느라 문학성 높은 작품을 더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고 회고한다. 술은 상상력을 일깨우기도 하지만 작가와 작품을 죽여버리기도 한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창녀와의 사랑에 빠진 알코올 중독자의 이야기다. 술에 절어 허우적거리며 가족과 생업을 잃은 남자, 화대를 지불하지만 술에 취해 섹스를 요구하지 않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미국 작가 존 오브라이언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오브라이언은 가난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 살다가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되기 직전에 타계했다. 영화에 나오는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은 연민을 불러일으키지만 현실 세계에서 알코올 중독은 가족까지 피폐하게 만드는 악성 정신질환이다.

▷연세대가 신입생 교양과목으로 ‘술과 주조공장 견학’이라는 주도(酒道) 강의를 개설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술을 마셔보지 못하다가 대학 신입생 환영회 모임에서 반강제로 술을 과도하게 마신 학생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여러 차례 있었다. 술은 처음 배울 때 제대로 배워야 한다. 술 때문에 사회 적응에 실패하거나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숱하다. 술의 길에 첫발을 내딛는 대학 신입생들에게 술에 관해 바른 지식과 법도를 가르쳐 주는 강의는 매우 유익할 것 같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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