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전세계 극장가는 9.11 테러라는 역사적 사건 이후 판타지의 역습을 받았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반지의 제왕’이 현실 저편의 세계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런데 이들 판타지 영화가 젖줄을 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영국의 판타지 문학이다.
할리우드 영화와 영국 판타지 문학의 만남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1931년 토드 브라우닝은 벨라 루고시를 내세워 ‘드라큘라’를 완성했는데, 이것은 영국의 소설가 브람 스토커의 원작 ‘드라큘라’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930년대 할리우드에 출몰한 또 하나의 괴물은 프랑켄슈타인. 영국의 여류소설가인 메리 셸리의 소설에 기초한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1931년에 큰 성공을 거뒀고, 이어 ‘프랑켄슈타인 유령’, ‘프랑켄슈타인 신부’(1935) 등의 속편이 쏟아졌다. 19세기 영국 문학의 고딕 소설의 전통에서 꽃피워 낸 두 괴물은 1930년대 이후 오랫동안 스크린의 주역으로 환영받았다.
문학사가들에 따르면 고딕 소설은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인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유행한 서사양식이다. 낭만주의와 산업혁명의 시대적 배합이 고딕 소설이라 일컬을 만한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었는데, 호레이스 월폴의 ‘오트란토 성’을 기점으로 윌리엄 고드윈, 메리 셜리가 계보를 잇는다. 고딕 소설은 황폐한 저택, 어두운 숲, 구불구불한 계단, 비밀 통로, 괴물의 형상, 저주 등 초자연적이고 기괴한 이야기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신비감과 공포감을 주려고 했다. 영국을 배경으로 한 ‘디 아더스’와 같은 영화도 고딕 소설의 한 자락과 맞닿아 있다.
▼국내에 번역된 판타지 문학▼
고전 ‘프랑켄슈타인’은 아동용 다이제스트 판이 전부였는데 이제서야 두툼한 번역본이 출간됐다. 이미 나와있는 ‘드라큘라’와 더불어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자면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여성의 고유 권한인 ‘생명창조’의 영역을 침범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탈리아의 문예이론가 프랑코 모레티는 ‘공포의 변증법’이라는 글을 통해 드라큐라에게서 자본가의 모습을, 프랑켄슈타인에게서 노동자의 모습을 읽어내기도 한다. ‘오트란토 성’ 역시 그 동안 번역되지 않은 고전 중 하나인데, 황금가지에서 묶어 낸 ‘환상문학전집’에 포함되는 행운을 얻었다. 유행보다는 고전을 선택한 이 시리즈는 ‘마법사’와 같은 번역본이 눈에 띈다.
‘마법사’는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작품을 읽고 나면 오늘날 유행하는 롤 플레잉 게임의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마법사, 난쟁이, 괴물들과의 싸움은 중세 이후 다양하게 변해온 서구 문학의 아라비안 나이트였다.
열대야를 이길 비장의 무기로 에드거 앨런 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추리문학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공포문학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호러영화 감독들에게 포는 일종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할 수 있는데, 근작 중 가장 눈에 띄는 애정 고백은 ‘검은 고양이’라는 제명으로 출시된 작품. 이탈리아 스파게티 호러영화의 대가 다리오 아르젠토와 좀비영화의 아버지 조지 A. 로메로가 각각 연출해 두 편을 엮은 이 영화의 원제는 ‘두 개의 사악한 눈동자’.
아르젠토는 단편 ‘검은 고양이’를 선택했고, 로메로는 ‘M. 발드마르 사건의 진실’이라는 국내에는 다소 생소한 단편을 선택했다. 두 감독은 영화 초반 포의 무덤과 생가를 화면에 담아내면서 감사를 표하고 있다.
이외에도 프로이트가 탐독했던 독일 작가 E.T.A 호프만의 단편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환상 문학을 엿볼 수 있는 ‘탱고’라는 작은 선집도 하룻밤을 보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친구이다.‘탱고’를 잠시 들여다 보면 판타지라는 것에 공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이’라 부를 수 있는 놀라움의 미학들을 향유하는 카타르시스도 있다. 20세기 문학의 대가인 보르헤스의 작품이 지닌 환상성 역시 이러한 경이의 문학에 상당부분을 기대고 있다.
▼사이언스 픽션▼
할리우드 영화와 관련해서 오랫동안 사랑 받아 온 판타지 장르는 ‘사이언스 픽션’ 장르이다. 최근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원작자 필립 K. 딕의 작품집들이 출간되고 있고,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윌리엄 깁슨, 로봇의 개념을 만든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번역되는 추세이다. 이들 작품 중 몇 편의 영화로도 옮겨졌다. 하지만 그들의 방대한 세계를 담기에는 2시간의 상영 길이가 너무 짧다. ‘쥬라기 공원’의 원작자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만 해도 카오스 이론을 재미있게 요리하면서 현대 과학과 지식인의 병폐를 잘 꼬집어 주고 있다. 크라이튼 특유의 스릴러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페이지마다 긴장감이 넘친다.
판타지 장르는 전세계적이지만 동시에 지역적인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닌 판타지 문학의 감수성은 무엇일까. 최근 서구에 영향을 받은 다양한 판타지 문학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전설의 고향’의 구미호와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어진 것 같다. 신상옥 감독이 만든 ‘천년호’와 같은 구미호 영화는 대대로 인기있는 소재였다. ‘여고괴담’ 시리즈가 다른 판타지 영화에 비해 각광을 받은 것도 아마 귀신에 관심이 많은 정서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긴 최초의 한문 소설인 김시습의 <금오신화>도 대부분 귀신과 정담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서해 건너 중국의 정서도 비슷한 면이 있는 탓인지 ‘천녀유혼’은 귀신과 인간이 사랑을 나눈다는 이야기이다. 귀신과의 러브스토리는 동남아 지역의 독특한 판타지 중 하나다.
이상용 영화평론가·poema@nownuri.net
영화로 제작된 환상문학 계열의 명작 | ||||
제목 | 저자 (출판사) | 내용 | ||
드라큘라 | 브램 스토커(열린책들) | 흡혈과 살인을 일삼지만 지순한 사랑을 간직한 주인공을 다룬 고전적 판타지 | ||
프랑켄슈타인 | 메리 셸리(인디북) | 과학에 의해 창조된 인조인간의 비극을 최초로 다룬 환상물 | ||
오트란토 성 | 호레이스 월폴(황금가지) | 악마와 마법사의 세계를 깊이 있게 드러낸 고딕 소설의 효시 | ||
검은 고양이 | 에드거 앨런 포(하서출판사 등) | 고양이의 보복이라는 소재를 통해 추리소설에 인간내면의 심층심리 분석을 결합 | ||
탱고 | 루이사 발렌수엘라(문학과지성사) | 춤의 세계를 통해 남미의 남성주의를 비판한 라틴 아메리카 판타지문학의 대표작 | ||
마이너리티 리포트 | 필립 딕(집사재) | 발생되지 않은 범죄의 예측가능성을 다룬 미래 사이언스 픽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