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89…밀양강 (5)

  • 입력 2002년 8월 4일 17시 26분


여자는 햇볕에 비치는 곳에 서 있음을 알았지만 그늘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햇빛보다 무서운 것이 있을까, 또 하루가 시작되고 말았다. 오늘도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일은 맑은 날 양지바른 곳에 서 있는 것보다 소모가 심하다.

이제 곧 신사 참배와 청소를 위해 그 사람의 아들이 계단을 올라올 것이다. 아들의 얼굴은 본 적이 없지만,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매일 보는 남자의 얼굴과, 한 번밖에 본 적 없는 아내의 얼굴을 눈 속에 나란히 놓고, 부부의 큰아들이 돌계단을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봄바람에 여자의 푸른 치마 자락이 둥실 부풀어올랐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여자아이가 얼굴을 위로 향하고 올라왔다. 그리고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돌계단은 까까머리 남자아이들로 가득 차고, 선생의 모습도 보였다.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는 학생들에게, 여자는 안녕 이라고 말하면서 미소지었다. 폐가 되니까, 우측으로 두 줄로 나란히! 선생의 한 마디에 학생들은 오른쪽으로 몰렸다. 선생이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군가를 부르기 시작하여 학생들은 노래하면서 신사를 향해 행진했다.

<바람에 펄럭이는 연대기

표식은 떠오르는 아침 해

깃발은 날아오는 총탄에

찢어질수록 명예로운 것

몸은 일본의 용사니

깃발에 부끄럽지 않게 진격하자

쓰러질 때까지 나아가자

찢어질 때까지 나아가자

깃발에 부끄럽지 않게 부끄럽히지 않게

어찌 두려움이 있으리오

어찌 주저함이 있으리오>

여자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여자는 바람에 휘날리는 치마를 밟지 않도록 한 걸음 한 걸음 확인하면서 내려갔다. 선생과 학생들의 노래 소리가 영남루 앞을 지나 정자에 접어들었을 때, 한 소년이 돌계단을 뛰어올라왔다. 그 사람의 아들이다, 여자의 심장이 방망이질치듯 쿵쿵거렸다. 파파파파 파파파파, 숨소리가 다가오고, 여자는 안녕 이라고 말을 걸었다. 지각이닷! 소년은 두 팔을 힘차게 저으면서 한 단씩 건너 뛰어올라왔다. 파파파파 파파파파. 소년의 숨소리에 남자의 숨소리가 겹쳐졌다. 파파파파파파파파. 바람이 세졌다. 치마가 여자의 다리에 휘감기고, 저고리 고름이 소년의 뒤를 좇았다. 하늘 하늘 하늘 하늘, 하늘 하늘.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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