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 휴스 칼럼]기다림은 끝났다

  • 입력 2002년 6월 3일 18시 38분


4일밤 부산에서 벌어지는 한국-폴란드전이 끝나면 우리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진짜 명장인지 아닌지 알게 될 것이다. 탄탄한 실력을 갖고 있지만 기를 죽일 만큼의 실력은 아닌 폴란드를 상대로 한국이 승리한다면 이미 세네갈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작된 흥분의 불꽃에 기름을 붙는 격이 될 것이다.

긴장감이 전해져온다. 오늘 경기는 팽팽한 접전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선수들이 지난주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처럼 폴란드를 끈질기게 몰아친다면 이길 것이다. 승리의 기쁨은 부산의 월드컵 구장을 흔들 것이고, 그 영향은 비무장지대(DMZ)에 까지 미칠 것이다.

한국에서 따뜻한 환대를 받고 있는 외국인으로서, 나는 마음 속에서 좀처럼 한국의 분단 상황을 떨쳐낼 수가 없다. 남쪽은 전 세계의 이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북쪽은 아무것도 없다. 88서울올림픽때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14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몹쓸 DMZ는 한반도의 동포들을 서로 떼어놓고 있다. 스페인의 라울 곤살레스가 이 대회 최고라 불릴만한 골 넣는 장면을 보지못한 사람들은 북한 주민들 뿐이다.

곤살레스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왕자라 할만하다. 작지만 유연하며, 최고의 균형감각을 타고 났다. 그는 천재적인 눈과 주변의 모든 선수들이 공포로 몸이 얼어붙어있는 상황에서도 골을 넣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녔다.

그가 슬로베니아전에서 넣은 골은 굉장함 자체였다. 미드필더 루이스 엔리케가 슬로베니아의 위험 지역으로 쏜살같이 들어가자 곤살레스는 공이 오기를 기다렸다. 공이 오자 슬로베니아 수비수 무아메르 부그달리치가 달려들었다. 곤살레스는 투우사처럼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흔들어 부그달리치를 따돌렸다. 그러나 결코 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부그달리치의 발 끝이 불과 수센티미터 차이로 그를 놓치는 순간 곤살레스는 슛을 날렸고 공은 네트에 꽂혔다. 이러한 골은 달콤한 과즙과도 같다.

아마 곤살레스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한국 상공 위를 중국으로부터 온 황사가 뒤덮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또 다른 ‘더러운’ 황사 구름이 한국을 뒤덮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지도 모르겠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부정한 권력 다툼 말이다.

서울에서 열린 FIFA총회에서 제프 블래터는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회장에 재선됐다. 하지만 블래터 회장은 지난달 31일 월드컵 개막식에서 그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거나 돈으로 표를 모은다는 FIFA의 정책에 별로 영향받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창피스러운 일을 당했다.

개막식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었다. 한 한국인 관중이 1945년 이후 일본 왕가 인사로는 처음으로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타카마토 왕자에게 정중하게 박수를 보낸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손을 맞잡은 모습은 서로 반목하는 이웃 국가들이, 잠시뿐일 지라도, 축구를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나는 조금은 아시아인의 관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동아일보에 칼럼을 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자신이 한국의 16강 진출을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31일 개막식에서 한국 국기와 일본 국기가 엄숙한 분위기 아래 함께 경기장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정말 코끝이 찡했다. 이보다 더 조화로울 수 있을까.

이 장면이 외국인인 나에게도 상징적인 것이었는데 한국인들에게는 과연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갔을까. 짐작만 겨우 할 수 있을 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마침내 이번 대회에서 아시아의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두 나라는 축구를 갖고 서로 싸우기 보다는 축구를 통해 협력하는 것을 배운 것이다.

또 이번 한국 방문에서 축구가 유교 철학에 속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까지 나는 영국이 축구를 발명했으며 프랑스가 축구를 월드컵 대회로 발전시켰다고 믿었다. 하지만 큰 북이 둥둥 울리는 개막식 장면에서 나는 축구의 역사가 고대 동아시아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축구 경기는 분명 승자의 능력을 과시하는 경기다. 하지만 동시에 축구에는 협력과 관용이라는 ‘기사도적인 행위’가 포함돼있다.

축구의 음양(陰陽)은 미스테리다. 하지만, 라울과 우리는 이해한다.

영국 축구칼럼니스트 robhu@compuser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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