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막판 승부를 낚아채는 힘

  • 입력 2002년 5월 28일 17시 31분


대국장 문을 여니 ‘훅’하는 더운 기운이 얼굴을 덮친다. 창으로 스며드는 뜨거운 햇볕. 두 젊은이가 뿜어내는 살기(殺氣).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응어리같은 것이 온 방을 감돌고 있었다. 단 1분만 있어도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

24일 오후 4시.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선 이창호 9단과 안조영 7단이 마지막 공력을 쏟아내고 있었다. 제36기 국민패스카드배 패왕전 도전 3국.

1, 2차전 모두 반집으로 승부가 갈렸다. 이 9단의 2연승. 특히 2국에선 모든 기사들이 마지막까지 ‘안 7단의 반집승’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9단이 ‘반집 패’ 2개를 모두 이기는 묘수를 터뜨리며 승패를 바꿔 놓았다. 안 7단은 국후 “반집을 진 것보다 그런 바둑을 역전당한 게 억울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안 7단은 이 9단에게 7전 전패를 당했다. 거기다 두번 연속 반집패를 당하면 힘이 쪽 빠질 만도 하지만 그의 얼굴엔 한판은 꼭 건지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이젠 타이틀이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였다.

장면도에서 누구나 흑의 다음 수로 백 4의 곳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가장 큰 곳이며 여길 두면 흑이 집으로 크게 앞서게 된다. 하지만 이 9단은 당연한 수에 지루하게 뜸을 들이고 있었다. 이윽고 흑 1.

인터넷 중계를 하던 양재호 9단은 이 수의 의미를 검토하더니 ‘이 9단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수’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흑 1을 게을리 하면 단단해 보이는 하변 흑진에서 A와 B의 선수를 바탕으로 ‘가’까지 쳐들어가 살아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흑 1은 이른바 큰 곳보다 급한 곳. 백이 2로 침입해 집으론 미세해졌지만 승부의 물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이 9단의 혜안이었다. 그는 한판의 운명을 꿰뚫고 있었다.

백 4까지 귀를 빼앗긴 흑은 또다시 긴 장고에 빠졌다. 흑 5. 이 역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수였다. 검토실은 벌떼처럼 시끄러워졌다. ‘수가 안난다면 명백한 2집 손해’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안 7단 역시 장고에 들어갔다. 뒷맛이 나쁘기 때문에 ‘나’로 물러서면 안전하다. 하지만 백 6이라면 2집 이득. 승부를 백쪽으로 확실히 뒤집을 수도 있다. 2번 연속 반집패의 악령에 시달렸던 안 7단은 눈을 질끈 감고 백 7을 두드렸다.

그러나 ‘2집 이득’이 안 7단의 발목을 잡았다. 이 9단은 상변을 깨끗하게 정비한 뒤 완벽한 수순으로 우하귀에서 수를 내버렸다. 217수만에 흑 불계승.

안 7단은 이번 도전기에서 이 9단에 비해 결코 밀리지 않는 기량을 보여주었다. 안 7단은 가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이 9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인함을 보여줬다. 하지만 마지막에서 승부를 낚아채는 힘, 그것이 이 9단에 비해 부족했다.

이 9단은 대국후 인터뷰에서 “3판 모두 좋지 않고 실수가 많은 바둑이었다. 이겨서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겼다. 판세가 유리하든 불리하든, 그는 강하다.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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