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2002 대선후보 검증]제1부 공인 이회창과 노무현<4>총리와 장관

  • 입력 2002년 5월 16일 18시 39분


《동아일보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가 확정됨에 따라 양당 후보에 대한 검증 기획보도를 준비했다. 첫 번째로 ‘공인 이회창과 노무현’을 추적해 봤다. 두 후보는 시기와 기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판사 변호사 각료 정치인의 길을 걸어왔다. 동아일보는 유력 대선후보의 자질과 능력, 공약과 정책에 대한 검증작업을 12월 19일 대선 때까지 계속할 예정이다. 물론 최대한 객관성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제1부 공인 이회창과 노무현▼

- ③대쪽과 인권
- ② 변호사 시절
- ①무명 시절

▼이회창 후보▼

김영삼(金泳三) 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8월16일, 감사원은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에게 서면질의서를 띄운다. 평화의 댐과 율곡사업에 대한 최고 정책결정권자의 개입 여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전직 대통령의 재임시 행위에 대한 감사는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당시 감사원장은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로, 그의 취임 일성은 ‘감사에 성역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전직 대통령도 만만치 않았다. 전두환씨는 독자적인 대국민발표문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노태우씨는 “기종 변경은 본인 소신에 따른 정책판단이었다”는 짤막한 회신만 보내왔다. 감사원은 이를 답변으로 간주하고 감사를 종결했다.

이에 대해 ‘감사의 성역을 깼다’는 호평도 있었고 ‘면피성 감사에 그쳤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 같은 상반된 평가처럼 이 후보의 ‘법대로’ 원칙은 양날의 칼이었다.

율곡사업 감사결과 발표 이후 그는 한동안 ‘거짓말’ 시비에 시달린다. 핵심의혹 대상이던 권영해(權寧海) 당시 국방부장관에 대해 이 감사원장이 “권 장관의 비리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예상외로 깨끗했다”고 발표했지만, 계좌추적 결과 권 장관의 동생이 무기중개업체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

그는 이후 사석에서 “권 장관에 대해 나쁜 소문이 나돌고 있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고, 그렇지만 소문처럼 장관이 흔들릴 정도의 문제는 아니어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고 해명했다.

당시 또 하나의 성역이었던 안기부(국정원 전신)도 이 후보의 ‘원칙’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안기부가 평화의 댐 건설 경위를 감사하기 위해 찾아간 감사관의 출입을 봉쇄한다는 보고를 받은 이 후보는 “그대로 밀고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황영하(黃榮夏) 당시 감사원 사무총장은 “한나절간 옥신각신한 끝에 결국 감사관들이 들어갔고, 이후 교도소에 있던 장세동(張世東) 전 안기부장까지 조사한 끝에 안기부가 북한의 수공 위력을 과대 포장했다는 점을 입증해 발표했다”고 말했다.

이 후보는 감사원장 임기(4년)를 4분의 1도 채우지 못하고 총리로 영전한다. 그는 1993년12월 총리에 부임하자마자 헌법규정을 내세워 각료제청권을 행사하려 했으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윤홍선(尹弘善) 당시 총리실 정무비서관은 “취임 직후 14개 부처 개각 때 이 총리가 부처별로 2, 3명씩 추천인물을 들고 YS와 독대했으나, 나중에 들어보니 일부는 말도 못 꺼냈고 일부는 YS가 수긍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 후로도 청와대와 마찰이 잦았다. 1994년 3월 ‘관변단체 예산지원 중단’ 지시도 청와대와 사전 협의없이 발표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청와대에서 지명해 온 총리비서실장 인선도 이 총리는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발탁했다.

당시 총리실의 한 간부는 “총리실 일에 간섭하려 드는 모 대통령수석비서관에 대해 이 총리가 ‘쥐×× 같은 놈’이라며 격노하기도 했다. 이 총리는 다른 기관과 부딪치면 정면으로 결판을 내려고 했지 적당히 조정하거나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 업무 스타일의 명암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총리 취임 당시 19년 몇 개월을 근무한 총리실 직원이 있었는데 ‘연금 수령이 가능하도록 몇 달만 더 근무하게 해주자. 대기발령도 좋다’는 주위의 건의를 뿌리치고 이 총리는 곧바로 이 직원을 내보냈다.

총리직 사퇴 파동도 이 후보의 원칙이 빚은 YS와의 충돌 때문이었다. 이 총리는 1993년 4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 회부된 안건이라도 총리의 사전 승인을 받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YS는 이를 대통령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퇴냐 해임이냐에 대해서는 지금도 설이 엇갈린다.

YS는 회고록에서 “‘잘못했으니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이 총리의 간청을 뿌리치고 해임했다”고 밝혔다. 박관용(朴寬用·한나라당 의원) 당시 대통령비서실장도 “안그래도 헌법상 권한 운운하며 총리가 대통령 권한까지 침해하려는 것에 화가 나 있던 YS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고 말했다.

반면 이 후보는 1997년 대선후보 TV토론에서 “소신껏 사표를 냈다”며 엇갈린 주장을 했다. 윤홍선씨도 “100% 사표다. 이 총리는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총리실간부회의에서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와 안기부 도청 문제를 대통령에게 건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표를 내겠다’고 밝혔다”며 이 후보 주장을 뒷받침했다.

아무튼 이 후보는 4개월간의 단명총리로 공직생활을 마감한다. 그러나 총리에서 물러난 뒤 오히려 더 높아진 국민적 인기가 그에게는 향후 정치적 자산이 된다.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노무현 후보▼

2000년 8월 개각에서 해양수산부장관으로 발탁된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는 부임 직후 국장들의 업무보고를 받을 때부터 특유의 파격을 보여줬다. 그는 실 국장들을 장관실로 부르지 않고 직접 국장실로 찾아다니며 브리핑을 받았고, 해당 국의 과장과 사무관 계장들까지도 참석시켜 서너 시간씩 토론을 벌였다.

당시 해운물류국장이었던 서정호(徐廷皓) 현 해양수산개발원 파견관은 “업무보고 때 노 장관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국장들은 눈 밖에 나서 한참 동안 고생해야 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노 장관은 일단 믿음이 가는 국장에 대해서는 직위를 붙이지 않고 ‘○○야’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대했다. 그는 승용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수행비서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게 했다.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 수행비서와 이런저런 상의를 하는 일이 많은데 뒤통수에 대고 얘기를 하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니냐”는 게 그의 설명이다.

노 장관은 재임기간 중 빈자리 메우기 인사를 빼고는 정기인사(2000년 12월)를 딱 한번 했는데, 인선 과정이 직원들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인사를 앞두고 노 장관은 “함께 일하고 싶은 과장을 1, 2, 3순위로 세 명씩 써내라. 과장들은 희망하는 부서를 1, 2, 3순위로 적어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함께 일하고 싶은 부하직원’과 ‘희망하는 자리’를 모두 맞춰본 뒤 짝이 맞지 않아 오갈 데가 없게 된 과장 2명은 지방으로 내려보냈다.

어느 조직이든 상사들이 ‘탐내는 부하’와 ‘싫어하는 부하’로 나누어져 있고, 이는 결국 업무능력과 직결돼 있다는 게 노 장관의 논리였다. 그는 처음에는 어느 상사도 받지 않으려 하는 직원은 직위해제까지 하려 했지만 간부들의 만류로 지방근무를 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노 장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과장은 1년에 1명씩, 국장은 3년에 1명씩 퇴출시키는 방안도 내놓았다. 강제 도태로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겠다는 의도였다. 이 아이디어는 노 장관이 8개월 만에 물러나는 바람에 실현단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해수부 내에서 적지 않은 반발을 불렀다. 직업공무원 조직을 너무 흔든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원래 민원이 많은 부처이기도 했지만 정치인 출신인 노 장관은 재임시 자신이 속한 민주당을 포함해 정치권으로부터 적지 않은 민원을 받았다.

한 번은 민주당 L의원이 직접 노 장관을 찾아왔다. 지역구 앞바다의 갯벌을 매립해 개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지역주민들의 민원이었다. 노 장관은 “다른 의원들은 보좌관을 보내 민원을 부탁하는데 의원님께서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라며 담당과장을 불렀다.

하지만 담당과장은 그 자리에서 “갯벌 매립은 생태계 파괴 때문에 허가요건이 매우 까다롭다”며 “어렵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노 후보는 ‘매립’이 아닌 ‘준설’로 바꿔 허가를 내주는 아이디어를 냈고, 결국 민원은 성사됐다.

집단민원도 노 장관은 피하지 않고 직접 부딪쳤다. 2000년 11월 경북 후포 지역의 오징어 채낚기 어업을 하던 어민들이 집단 상경해 해수부 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을 때의 일.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마치고 청사로 돌아오던 노 장관은 “시위대가 와 있으니 차를 후문으로 대는 게 좋겠다”는 비서관의 연락을 받았지만 시위대 앞에 차를 세우고 민원인들을 직접 만났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을 들은 뒤 수용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서자 그대로 돌려보냈다.

노 후보는 수협에 대한 1조2000억원의 공적자금 투입건을 성사시키면서 재정경제부가 요구한 ‘신용사업부문 분리’를 막아낸 것을 해수부장관 시절의 최대 업적으로 꼽는다. 당시 재경부는 공적자금 투입 조건으로 수협의 신용사업부문을 분리할 것을 요구했으나, 수협은 그럴 경우 예금인출사태가 벌어져 일선 조합이 무너질지 모른다며 반대했다.

노 장관은 당시 재경부 은행과장을 4, 5차례 직접 만나 협조를 구하는 한편 실무담당자인 사무관과는 e메일을 통해 토론을 벌인 끝에 수협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부산신항만 공사의 추가 소요예산을 따낼 때에도 노 장관은 기획예산처의 담당과장을 직접 찾아가 점심을 사줬다.

이 같은 업무추진 방식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정상적인 업무 프로세스가 아니다. 장관들이 이런 식으로 일한다면 조직의 질서가 헝클어지고 공식업무보다는 ‘안면’에 따라 업무가 이뤄질 우려가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노 후보는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딱 1년만 장관을 한다. 2001년 8월에는 대통령후보 경선 준비를 하러 나간다”고 말했다. 장관직은 대선 출마를 위한 국정수업용이었던 셈이다.

최영해기자 y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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