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최화경/훌리건 보험

  • 입력 2002년 5월 3일 18시 23분


영국 하면 ‘신사의 나라’가 떠오른다. 검은 정장과 모자 차림에 긴 우산은 필수, 바로 영국 신사의 모습이다. ‘영국 신사론’이란 책은 신사의 조건을 이렇게 제시한다. 인내심이 강할 것, 물질에 집착하지 말 것, 남에게 상처 주지 말 것, 정치와 종교를 화제에 올리지 말 것…. 또 양복은 장례식에 입을 것과 외출용 두 벌이면 되며 롤스로이스를 타지 않는 검소함도 신사도에 들어간다. 이처럼 근엄하고 예의가 바르다는 영국인이지만 축구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세계에서 가장 광적이고 난폭한 축구팬이 바로 영국 훌리건이다.

▷훌리건이란 단어는 1898년 영국 런던경시청 보고서에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당초 부랑자나 폭도를 지칭하던 이 말이 축구장 난동꾼을 가리키게 된 것은 1985년 벨기에 브뤼셀의 헤이젤 스타디움 참사가 있고부터. 잉글랜드 리버풀과 이탈리아 유벤투스가 맞붙은 유럽 챔피언컵대회 결승전 도중 영국 응원단이 이탈리아 응원석으로 돌진하는 바람에 담이 무너져 39명이 깔려죽은 사고다. 이때부터 영국 훌리건은 어디서든 기피 대상이다. 4년 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튀니지 응원단과 난투극을 벌여 악명을 떨쳤다. 영국이 2006년 월드컵 유치전에서 진 게 훌리건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요즘은 영국뿐만 아니라 각국의 축구장 난동꾼을 모두 훌리건으로 싸잡아 부른다. 난폭함으로 따지면 네덜란드와 독일 아르헨티나 훌리건도 영국 훌리건 못지 않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올 3월 3명이 한꺼번에 생명을 잃기도 했다. 지난 100년 동안 축구장 난동으로 숨진 사람만 1000명이 넘는다니 이쯤 되면 축구를 보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할 판이다. 아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에선 훌리건을 축구 망나니를 뜻하는 ‘쭈추류망(足球流氓)’으로 부르는데 그 수가 800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달 말 개막하는 한일 월드컵에서도 훌리건은 골칫거리다. 특히 잉글랜드 독일 아르헨티나 등의 예선경기가 몰려 있는 일본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갖가지 대책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일까. 경기장 주변 상가들이 앞다퉈 훌리건 보험에 가입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5000엔을 보험료로 내면 최고 100만엔까지 보상받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이들이 16강에 진출하면 우리나라로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선 탈락하라고 빌 수도 없으니 이래저래 걱정이다. 한국판 ‘훌리건 보험’이라도 나와야 할까 보다.

최화경 논설위원 bb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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