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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4월 23일 17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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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전설적인 활약을 펼친 야신이 오늘날과 같은 엄청난 스피드가 붙는 첨단 축구공을 만나도 당시와 같은 활약을 펼칠 수 있었을 지 궁금한 것은 그의 수훈갑을 전하는 각종 기록들이 너무나 화려하기 때문.
오죽하면 세계 최고의 스포츠 잔치인 월드컵에서 국제축구연맹(FIFA)이 한 개인의 이름을 딴 상으로는 유일하게 ‘야신상’(최고의 활약을 펼친 골키퍼에게 수여하는 상)을 시상하고 야신이 즐겨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골키퍼들이 검은 유니폼을 챙겨 입을까.
야신은 1951년 러시아 모스코 다이나모팀의 골키퍼로 축구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71년 은퇴할때까지 20년동안 150회 이상의 페널티 킥을 막아냈고 국가대표로 활약한 78경기에서는 단 70골만 허용하는등 0점대(경기당 0.90골)실점률을 기록했다. 러시아가 1956년 호주 멜버른올림픽에서 우승하고 1960년 유럽선수권대회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의 덕이었다.
한쪽 다리를 살짝 구부린 독특한 자세로 슈팅을 잡아내는 그의 곡예사같은 묘기에 매료된 세계의 축구팬들이 야신에게 ‘신의 손’ ‘철의 수문장’ ‘흑거미’(항상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데서 유래) 등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야신이 축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그의 전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1929년 모스크바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야신은 열세살 때 공장에 다니는 틈틈이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려 공을 차다 49년 디나모팀 감독의 눈에 띄여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 축구팀과 아이스하키팀을 함께 보유하고 있던 디나모에서 축구선수로는 설 자리가 없어 아이스하키팀의 골키퍼로 선수생활을 이어가다 51년 축구팀으로 옮겼지만 벤치워머 신세를 벗어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축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던 53년 주전 골키퍼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그에게 출전기회가 넘어왔고 이후 ‘야신의 전설’은 시작됐다.
야신은 54년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7년동안 대표로 활약했고 63년에는 ‘FIFA 창설 100주년 기념 월드 베스트11’ 골키퍼로 선정됐으며 68년 최고 영예인 레닌훈장을 수상하며 황금기를 구가했다.
71년 디나모와 유럽올스타팀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야신은 90년 61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월드컵에는 58년 스웨덴월드컵부터 3회 연속 출전했다.
김상호기자 hyangs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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