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황호택]인터넷 정치학

  • 입력 2002년 4월 22일 18시 18분


러닝타임 1분48초짜리 음성 파일이 네티즌들 사이에 급속도로 번져 20일 남짓한 기간에 900만명 이상이 접속하는 기록을 세웠다. 김대중 대통령이 ‘F15 자전거’를 파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향해 전라도 사투리로 막말을 퍼붓는 ‘엽기 김대중’ 파일은 인터넷의 가공할 전파력을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이 파일의 확산 속도에서 보듯이 한국은 인터넷 인프라가 세계에서 가장 잘 갖추어진 나라이다. 인터넷 이용자는 2500만명에 육박하고 초고속 통신망 가입자는 800만명을 넘어섰다. 초고속 통신망 가입률로 보면 한국이 세계 1위이며 미국 홍콩이 그 뒤를 따라온다.

▼돈 안드는 선거운동▼

인터넷 이용자 중에서 선거권이 없는 초중고교생을 제외하더라도 네티즌 유권자가 1600만명을 넘는다. 97년 대통령 선거 때는 인터넷 이용자가 163만명에 불과했고 초고속 통신망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상전벽해에 가까운 매체 환경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매체 환경의 변화는 합법적 혹은 비합법적 정권 교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국 대통령 선거 사상 처음으로 TV 토론이 벌어진 1960년 존 F 케네디는 젊고 활력 있는 모습으로 여성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시종 밀리던 판세를 뒤집었다. 재미있는 점은 같은 토론을 라디오로 청취한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리처드 닉슨이 더 잘했다는 응답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은 카세트테이프 혁명이라고 불린다. 카세트테이프의 보급 확대 바람을 타고 외국에 망명중인 호메이니의 연설 테이프가 끊임없이 복제돼 대중을 선동해 독재정권과의 싸움에 나서게 했다.

최근 양당의 경선 열기를 타고 페이지 뷰가 급격히 늘어난 일부 인터넷 매체들은 스스로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종이신문의 쇠퇴를 선전한다. 텔레비전이 출현했을 때도 비슷한 예측이 나왔지만 신문은 기능을 특화해 오히려 발행부수와 지면이 늘어났다.

지하철 안에서 컴퓨터 부팅을 하기는 어렵고 넷 신문이 소파에 드러누워 읽는 종이 신문의 편이성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새로운 미디어 기술은 기존 매체의 기능을 바꾸어놓을 수 있지만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CD라는 혁신적인 기술이 생겼지만 편이성과 저렴한 값 때문에 카세트테이프는 지금도 건재하다. 선진국에서 이루어진 미디어 조사에서는 인터넷 이용자들의 텔레비전 시청 시간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신문 구독률과 구독시간은 줄지 않은 것으로 일관되게 조사되고 있고 종이 신문들은 온라인 판을 개설해 시너지 효과를 낸다.

젊은 네티즌들의 투표율이 인터넷에 의해 영향을 받을지도 관심거리다. 97년 선거에서 20대는 유권자 구성비가 27.5%였지만 68.2%의 투표율을 기록했고 50대 이상의 세대는 유권자 구성비가 26.5%였지만 89.9%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두 연령층의 유권자 수는 거의 비슷하지만 투표율에서 20%포인트 이상의 차가 났다. 네티즌들 간에 벌어지는 대선 관련 토론도 대화와 설득보다는 익명성 속에 숨어 자기 의견을 일방적으로 강화하는 사례가 많다.

거품이 심했던 닷컴 열풍처럼 인터넷 매체에 대해서도 다소 부풀린 평가가 없지 않지만 새로운 매체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후보는 1960년 미국의 닉슨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술 사주고 밥 사주는 운동원을 둘 필요가 없다. ‘엽기 이회창’ 혹은 ‘엽기 노무현’을 만들어 사이버 공간에 유통시키는 비용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승리는 온라인 공간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노무현 후보의 ‘노하우’ 사이트(knowhow.or.kr)에 뜬 글이나 동영상을 노사모들이 포털 사이트의 동아리와 카페로 부지런히 퍼 옮겨 준다. 장인의 좌익 경력을 문제삼는 이인제 후보의 공격을 러브스토리로 변환한 ‘아내를 버려야 하느냐’는 카피도 노하우 게시판에서 아이디어를 채용했다고 한다.

▼네티즌 대선 좌우할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홈페이지(leehc.com)는 ‘내 젊은 벗들에게’ 칼럼 등 젊은 층을 겨냥한 기획물이 눈길을 끈다. 토론방에 들어가 보면 이회창 후보를 비난하는 심한 욕글도 지우지 않고 밑에 답글을 붙여놓은 것이 이채롭다.

인터넷을 이용해 정치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는 네티즌들이 투표라는 정치적 행동에 실제 얼마나 참여하느냐에 따라 대선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통령 선거는 인터넷 정치학(Net-politics)이 오프라인 정치행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선구적 사례가 될 만하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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