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홈]‘96년 전세→작년 반포 34평 내집’ 朴과장의 성공기

  • 입력 2002년 3월 27일 17시 23분


서울 생활 17년째인 박순신 과장

회사원 박순신 과장(37)은 ‘촌놈’이다. 입만 열면 사투리가 묻어 나온다. 고향은 전남 무안. 어릴 땐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은 공부를 곧잘 했던 박 과장을 서울로 보냈다. 배고픈 유학생활의 시작.

대학을 졸업하곤 바로 건설회사에 들어갔다. 어떻게든 잘 살아야 했다. 그 시작은 ‘내 집’.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울에서 촌놈이 가장 원한 건 내집이었다.

상경(上京) 17년째. 이제 그는 강남의 30평형대 아파트에 산다. 꿈에도 그리던 중산층. 마침내 그 대열에 합류했다.


▼4500만원 상계동 전셋집▼

96년 결혼했다. 전세금 4500만원. 박 과장이 가진 전부였다.

상계동 주공아파트 16평형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방 두 칸과 손바닥만한 거실.

2년 후 산본신도시로 옮겼다. 아들을 생각해서였다. 집이 더 넓어야 했다.

주공아파트 25평형. 전세금은 6000만원이었다. 외환위기로 전세금이 폭락한 덕에 싼값에 얻을 수 있었다.

세 식구가 살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전세금이 오르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서 1000만원을 더 내야 할 판이었다.


집을 사기로 결심했다.

▼투자를 시작하다▼

직장과 가깝고 차익도 얻고 교육환경도 좋고…. 모두가 그렇듯 그가 세운 ‘내집마련 원칙’이었다.

새로 분양받기는 하늘의 별따기. 몇 번 청약을 시도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분양권을 사기로 했다.

99년 초. 자기 회사가 짓고 있는 사당동 아파트 25평형 분양권을 1억3000만원에 샀다. 처음 해보는 부동산 투자였다. 그 해 말 아파트가 완공되자 전세금으로 잔금을 치렀다. 드디어 내집마련.

▼지영아 미안해▼

그 집에서 더 오래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건설회사에 입사한 지도 벌써 7년. 박 과장에겐 부동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2000년 4월 아내(김지영·32) 몰래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8000만원을 빌렸다. 아내는 전업주부. 투자라고는 적금 넣는 것을 최고로 아는 사람이다.

그가 노린 곳은 강동구 고덕동. 재건축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그때만 해도 대출금 이자가 만만치 않았다. 투자가 잘못되면 겨우 마련한 사당동 아파트마저 날릴 수 있었다. 모험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고덕 주공아파트 16평형을 샀다. 매입금액은 1억5500만원. 대출금 8000만원에 전세(6500만원)를 안은 상태였다. 자기 돈은 1000만원만 투자하고 나머지는 모두 빚으로 산 셈이다.

계약을 하고 나서야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놨다. 아내는 난감해 했다. 박 과장도 결과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당장 매달 내는 이자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계약을 취소할 수는 없는 일. 부부는 결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갖고 있던 자사주를 모두 내다 팔았다.

“지영아 미안하다.” 그가 아내에게 할 수 있는 위로의 전부였다.

▼1000만원으로 1억원 벌어▼

재건축 바람이 일었다. 값이 뛰기 시작했다. 한 달에 1000만원은 기본이었다.

기쁨도 잠깐, 그해 10월 이후 서울 집값은 내림세로 돌아섰다.

세 달간의 약세. “이젠 팔아야 할까.” 때마침 전문가들은 2001년 주택시장이 침체를 겪을 것이라는 전망을 연달아 내놨다. 외환위기 이후 반등한 집값이 이미 상한선에 닿았다는 것이다.

당시 집값은 1억9000만원. 시세차익 3500만원 정도면 나쁜 성적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출금 이자비용에 취득·등록세와 양도세를 생각하면 여기서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너무 늦은 투자였다고 생각했지만 박 과장은 기다리기로 했다. 재건축이라는 호재는 여전한데다 서울 주택난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인 만큼 가격은 다시 오르리라 생각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2001년 시작과 함께 집값이 폭등했다. 한 해 동안 7000만원이 올랐다.

작년 말 드디어 집값이 2억6000만원에 닿았다. 팔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시장에 내놓았다. 수요는 많았다.

시세차익 1억500만원. 1000만원으로 10배의 수익을 남겼다.

▼촌놈 강남에 서다▼

빚을 갚고서도 당장 운용할 수 있는 목돈이 생겼다. 박 과장이 살던 사당동 집도 그새 5500만원이 올랐다.

“이젠 강남이다.”

박 과장에게 강남은 지명이 아니었다. 중산층을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게다가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들을 생각한다면 강남 진입은 ‘소명’에 가까웠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만큼 시세차익도 생각했다. 강남 주택시장은 만성적인 수요 초과 지역. 아파트가 현금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집값은 적어도 10년 동안은 더 오를 것으로 생각했다.

작년 12월 반포동 미도아파트 34평형을 계약했다.

강남의 30평형대. 계약을 치르고 돌아오면서 눈물이 났다. 촌놈 박 과장은 드디어 한국 중산층에 당당히 합류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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