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호기/조폭문화는 ‘공공의 적’

  • 입력 2002년 1월 10일 17시 55분


요즘 우리 사회에서 풍미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조폭(조직폭력배)’이다. 조폭과 연루된 게이트나 정치인에 대한 각종 의혹들은 물론 조폭을 다루기만 하면 대박을 터뜨린다는 영화계 속설까지 있을 정도니 바야흐로 조폭의 ‘황금시대’ 같기도 하다. 게다가 이번 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주먹들의 길’이란 제목으로 이를 다루고 있어 이제 조폭은 미국 마피아나 일본 야쿠자처럼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느낌이다.

우리 사회에서 조폭 문제가 부각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이른바 무슨 파 무슨 파 등 각종 조폭들은 수많은 범법 행위들을 저질러 왔다. 그동안 정부는 여러 번 조폭과의 전쟁을 선포해 왔음에도 이들은 근절되지 않고 오히려 활동반경을 넓혀 왔다. 과거에는 유흥가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최근에는 스스로 업체를 운영하거나 벤처투자 및 기업 인수 등 합법적인 기업활동까지 벌이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일부 청소년들은 조폭을 동경하고 영웅시하기까지 한다.

▼배타적 가족이기주의 위험▼

이런 ‘조폭 신드롬’을 보면서 더욱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은 조폭을 보는 기이한 시선 때문이다. 명백히 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집단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은 조폭에 대한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조폭 자체는 마땅히 사라져야 할 사회악으로 보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인 ‘조폭문화’에 대해서는 일종의 향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얼마 전의 ‘친구’에서 최근의 ‘두사부일체’까지 조폭 영화에 관객이 넘치는 현상 이면에는 우리 문화의 어떤 감성대를 건드린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조폭 못지않게 조폭문화가 우리 사회의 커다란 병폐라는 데 있다. 이 조폭문화는 개인보다 집단 및 조직을 우선시하고 그 안에서의 위계를 중시한다. 의리를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충성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게 이 문화의 본질이다. 한 마디로 조폭문화는 한국식 ‘비도덕적 가족주의’의 결정판이다.

이런 조폭문화는 물론 이중적인 측면을 갖는다. 한편에서 조폭문화는 민주주의의 장애물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법과 제도가 아니라 힘과 공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런 문화 속에서 절차와 합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가 성숙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조폭문화의 가족주의는 인격적 유대와 집단에 대한 희생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외부 구성원을 배타시하는 반면 내부 구성원들에게는 왜곡된 ‘인정과 격려의 휴식처’를 제공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 국민이 조폭문화에 대해 부분적으로 향수를 갖는 근본 요인일 것이다.

더불어 우리 사회의 무질서가 조폭문화를 부추겨 온 경향도 주목해야 한다. 범람하는 부정부패와 집단이기주의는 절차와 원칙을 무시하고 ‘힘의 논리’를 암묵적으로 정당화해 왔다. 돈과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회 풍조 속에서 일부 청소년들이 조폭을 일방적으로 영웅시하는 것은 조폭문화가 낳은 서글픈 귀결일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힘의 논리에 억눌려 온 힘없는 사람들에게 조폭영화들이 일종의 대리만족을 준 감도 없지 않다.

이런 조폭과 조폭문화를 뿌리뽑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과 원칙의 엄격한 적용이 중요하다. 법치주의가 확립되지 않은 곳에서는 자연 힘과 폭력의 논리가 기승을 부리기 마련이다. 항간에 떠도는 조폭과 일부 정치인의 유착설에도 많은 국민은 커다란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조폭에 대한 철저한 수사는 물론 그들과 연루된 사건들의 진실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법-원칙 엄격히 적용해야▼

동시에 조폭문화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버려야 한다. 조폭문화는 민주주의에 암적인 요소다. 다수가 아닌 소수가 의사결정을 독점하고, 토론과 합의보다 명령과 순종이 우선되며,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결코 뿌리내릴 수 없다. 따라서 조폭문화에서 공동체문화로의 전환을 위한 다각적인 교육 및 의식개혁이 매우 중요한 과제다.

현실과 영화가 다른 것은 조폭은 어디까지나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범법자일 따름이라는 점이다. 우리 밖의 조폭은 물론 우리 안의 조폭문화를 동시에 제거해야 할 시점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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