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중국이 그렇게 두렵습니까”

  • 입력 2001년 11월 21일 18시 19분


지난주 대만의 퍼스트 레이디 우수전(吳淑珍) 여사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2001 자유상’을 받았다. 자신이 직접 수상할 것을 강력히 원했으나 끝내 좌절된 남편 천수이볜(陳水扁) 대만 총통을 대신해서다. 지금 대만이 국제사회에서 겪고 있는 외교적 어려움의 한 단면을 보인 이번 사건의 사연은 이러하다.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세계 60여개국 진보성향 정당으로 구성된 LI(Liberal International)가 지난 2월 올해 수상자로 대만 민진당을 이끌어온 천 총통을 선정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집행위원회 회의 때 시상할 예정이었으나 덴마크 정부는 천 총통의 입국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장소를 스트라스부르로 옮겼으나 프랑스 정부 역시 비자발급을 거부했다. 결국 남편 대신 수상을 위해 하반신장애로 휠체어를 타야 하는 퍼스트 레이디가 힘겨운 장거리 여행에 올랐다. 입국비자 거부는 양국 모두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중국의 압력 때문이라는 것이 대만의 설명이다. 퍼스트 레이디가 받아든 수상트로피는 공교롭게도 ‘눈물방울’ 모양의 크리스털 제품이었으니 대만사람들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다. 우리 같으면 한바탕 여론이 들끓을 법도 했으나 이날 대만인들의 큰소리를 듣지 못했다.

▼고군분투중인 대만외교▼

10년 전 타이베이 시내에서 보았던 플래카드 속의 처변불경(處變不驚)이란 말이 다시 떠올랐다. 방문객의 눈엔 지금 대만은 ‘치열한 외교전쟁중’이다.

지난주 초 중국과 함께 확정된 대만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천 총통은 12년 동안의 투쟁 끝에 얻어낸, 국제무대에서의 역할 인정이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71년 중국의 진입에 밀려 쫓겨나듯이 유엔에서 탈퇴한 대만으로서는 그동안의 오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외교적 성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WTO 가입은 또한 대만 외교의 지상과제인 중국과의 양안(兩岸) 관계에도 직간접의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 대만은 해답모색에 한창이다. 행정원대륙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천밍퉁(陳明通) 부주임위원은 WTO 안에서 논의될 수 있는 여러 사안과 관련한 양안 대화를 준비중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12월1일의 총선결과에 따라 천 총통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될 경우 양안대화의 회복시기가 빨라질 가능성도 있음을 시사했다. ‘떠들지 않으면서도 상황을 곱씹으며, 느린 듯 하면서도 꼼꼼히 따지는 것이 대만사람, 대만외교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이면 단교 10년을 맞는 한국-대만간의 씁쓸한 관계에서 그러한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만외교에서 갈등의 한 각을 이루고 있는 것이 한국과의 관계다. 한마디로 대만사람들은 92년 8월 단교 당시의 모멸감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주변 다른 나라들도 같은 상황이었지만 섭섭하고 분한 마음을 아직도 표출하는 대상은 한국뿐이다. 92년의 양측 왕래인원 42만명이 지난해엔 20만명으로 반 이상이 줄어들었다는 기록은 서운한 관계를 잘 말해준다. 더욱이 대만에 유학중인 한국 젊은이는 1000여명인데 비해 한국에 유학간 대만 학생은 현재 20여명선이라는 사실은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실인심했는가를 자문케 한다.

▼단교 10년 되도록 무심한 한국▼

단교 당시의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10년이 다 돼가도록 옛친구에 대한 무성의 탓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정치대학 국제관계연구센터 조셉 우 박사는 ‘한국은 중국을 너무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최근 한국인 마약사범과 관련해 한국정부가 보인 자세를 꼬집는 말로도 들렸다. 무심한 한국의 자세는 결국 ‘중국눈치’ 때문이란 것에 많은 대만사람들은 공감했다. 한국의 모습이 그렇게 비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외교당국으로서는 결코 흘려버릴 말이 아니다. 대외관계에서 눈앞의 것에 집착해 현직을 떠난 옛친구들을 소홀히 대했다가 훗날 낭패를 본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는가. 지금 대만에는 TV드라마 등 한국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하한쭈(哈韓族)가 늘고 있다고 했다. 분야별로 인연을 맺었던 옛친구들이 실질협력관계를 다지는 민간차원의 관계복원은 진지하게 논의할 때가 온 것 같다. 단교 10년이 되도록 지금처럼 씁쓸한 맛만 되씹으며 서로 쳐다보기만 할 것인가.

<논설실장>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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