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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0월 29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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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교체기 ‘대목’을 맞아 한밑천 잡으려는 흑금성 아니면 백금성들이 얼마나 날뛸 것인가. 음모와 배신의 장난으로 얼마나 정치판을 어지럽힐 것인가. 아뜩하다. 김홍일 의원의 휴가 동향이라는 경찰 정보보고 유출에서 그런 조짐을 읽는다.
보고서 유출을 놓고 한쪽에서는 정의로운 내부자고발이라 해서 박수를 쳤다. 감시되어야 할 대통령 패밀리의 부적절한 행적을 국민 앞에 드러낸 것이라는 얘기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다른 일면도 있다. 경찰관이 야당에 정보보고서를 흘리면서 ‘덧칠’까지 해서 주었다. 중립적이어야 할 공무원들이 선거철이 온다고 저마다 줄서기 각개약진으로 날뛴다면 행정은, 나라는 어찌 될 것인가.
▼공무원들 선거철마다 줄서기▼
95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지방선거를 넉 달 앞두고 안기부의 한 직원이 ‘지방선거 연기 검토’문건을 민주당의 권노갑 최고위원측에 넘겨주어 안기부의 정치 개입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김덕 통일부총리(문건 작성시의 안기부장)가 경질되었다.
당시 DJ지지자들은 지금 제주도 사건에서 ‘창(昌)지지자’와 야당(한나라당)이 공감하듯 ‘정의로운 내부고발’이라고 환호하고 박수를 보냈다. 당시 여권 지지자들은 현정권 이상으로 정보를 흘리는 공무원의 ‘망국적 행태’를 개탄하고 걱정했다. 공교롭게도 그 지방선거에서 DJ야당이 약진하고, 이번 재보선에서는 ‘창(昌)야당’이 완승했다.
숨바꼭질의 술래가 바뀌는 것일 뿐이라고 하면 그만일 수 있다. 인간은 본시 권력지향적이고 그래서 음모와 배신, ‘줄서기’습벽은 인간 밑바닥에 꿈틀거린다고 하면 그만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언제까지 정치가 권력게임으로 소란 떨고 허송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일부 공무원과 권력 부나방이 줄서기 경쟁을 벌이도록 방치, 우리의 미래를 소진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정권의 습관성 정보수집벽, 정보기관의 정치 중독증을 고치고 바로잡아 글로벌 스탠더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OECD국가 어느 정권이 정보기관을 정치 분석이나 야당 대책에 이용하는가, 어느 나라 경찰이 정치인 동향을 살피고 보고하며 정보기관이 지방선거대책 문건을 만드는가.
이 정부의 큰 실책의 하나가 우리 정치의 전근대적인 유산을 깨끗이 청산하지 못한데 있다. 정보 보고라고 하는 그 매혹적이지만 허망하기 짝이 없는, 유용해 보여도 기실 무력하기 짝이 없는 덫을 걷어차 버리지 못함으로써 스스로의 명예와 정당성을 갉아먹고, 끝내는 그 덫에 말려들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정권이기에 정보부가 필요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 힘을 빌려 18년을 견디고 마침내는 정보부장의 암살극으로 정권을 마감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정보 정치의 최대 피해자 희생자인 DJ가 당당한 선거로 대통령이 되어 출범한 정부에서도 구시대의 어두운 유산을 씻어버리지 못했다.
자업자득으로 큰 타격도 입었다. 3공시절 치안본부 특별수사대로 시작된 사직동팀을 없애지 않고 활용하려다 상처만 입었다. 이른바 장관부인들을 둘러싼 ‘옷로비 사건’은 사직동팀의 개입으로 더 증폭되고 정권에 대한 손가락질로 번졌다.
▼'정보보고'의 덫에 걸린 DJ▼
99년말 국회내의 안기부 정보분실(529호실)의 사찰보고서 사건도 그렇다. 내각제저지 대응이 필요하다느니, 특정 의원의 동향 보고 같은 군사정권 시절을 연상케 하는 내용들이 ‘국민의 정부’ 이미지를 먹칠했다. 이번에 국가정보원 경제단장의 수뢰사건도 실망과 개탄을 불러일으켰다. 국가 안보와 대공 첩보를 책임지는 기관에 경제단이 왜 필요한지, 그 책임자가 5000만원의 뇌물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센 자리인지 국민은 납득하지 못해 분노한다.
소수정권이어서 정보의 힘이라도 빌리려 했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소수일수록 명분과 도덕성에서 힘을 찾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외면했다. 그 결과, 민심을 잃고 야당은 더욱 커졌다. 북풍 총풍 같은 범죄도 정치 보복과 구별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김대중 대통령은 ‘늦었다고 느낄 때가 그래도 가장 이른 때’라는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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