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한기홍/‘탄저 공포’ 키운 美정부

  • 입력 2001년 10월 25일 18시 21분


미국 정부가 최근 탄저균 사태에 안일하게 대처했다가 ‘위험을 증폭시켰다’는 비판에 몰리는 과정을 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5일 플로리다주에서 첫 탄저병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미 정부의 발언은 “테러와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선 드문 병이 발생한 것에 언론이 의문을 제기하자 토미 톰프슨 보건부 장관은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사망자가 계곡물을 마신 것이 사인이었을 수 있다.”

그 후 뉴욕과 워싱턴에서 잇달아 감염자가 발생해 사태가 악화되면서 미 정부는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존 애슈크로프트 법무부 장관은 “우편물에 탄저균을 넣는 것은 테러 행위”라고 즉각 비난했지만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테러 여부는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가린 뒤 판단해야 한다”며 생물테러 인정에 난색을 표명했다.

의회와 백악관의 우편물을 처리하는 브렌트우트 우체국의 탄저균 확산 사태는 혼란의 정점이었다. 미 정부는 16일부터 의회에 대해선 대대적 역학 검사를 실시하면서도 불안에 떠는 우체국 직원들에겐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우편물 취급과정에선 감염의 우려가 없다는 것.

그러나 22일 우체국 직원 2명이 추가로 사망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정부는 뒤늦게 전체 우체국 직원들을 상대로 역학검사를 하느라 법석을 떨고 있지만 우체국 직원들은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감추지 않았더라면 희생을 예방할 수 있었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24일에도 백악관은 우편물의 안전을 강조했지만 우정공사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밝혀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인들이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면서도 정부의 탄저병 대응을 질타하는 것은 당연한 일. 언론은 정부에 “있는 그대로 실상을 밝히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호미로 막을 수 있던 일을 가래로 막으며 허둥대는 미 정부의 모습은 위급한 시기일수록 정부가 국민에게 신뢰를 줘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일깨운다.

한기홍<워싱턴특파원>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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