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실세와 몸통’

  • 입력 2001년 10월 22일 18시 26분


YS 정권 시절 한보비리로 구속된 ‘상도동 집사장’이 “나는 깃털일 뿐”이라고 항변하자 세간의 관심은 자연스레 그러면 실세와 몸통은 누구냐로 모아졌다. 그 ‘실세와 몸통’ 소리가 DJ 정부에 들어서도 여전히 요란하니 이래저래 ‘양김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야당의원이 ‘이용호 게이트’의 몸통이 대통령 장남과 동교동계 좌장, 그리고 무슨 스포츠단 사장이라고 실명을 밝히자 민주당이 발칵 뒤집혔다. “의원의 면책특권을 악용한 막가파식 테러”라는 것이다. 민주당은 고발하고 대통령 장남은 고소하고, 검찰총장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한다. 그 와중에 제주의 한 정보과 형사가 정보보고 문건을 야당에 빼돌렸다며 경찰이 야당 사무실을 야밤에 전격 수색하는 소란까지 벌어졌다. 자칫 뭐가 뭔지 모르게 뒤엉켜 돌아갈 판이다. 그러나 뭐 그렇게 복잡할 건 없다. 요점은 야당의원이 폭로한 몸통이 진짜냐, 아니냐는 것이다. 정보과 형사 문제야 유출된 문건 내용이 조작된 것은 아닌 만큼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알 사람 다 아는 소문이거늘▼

몸통으로 거론된 인사들은 펄쩍 뛴다. ‘정치적 살인’이라는 것이다. 언론이야 국회에서 야당의원이 공개적으로 발언한 것을 보도하지 않을 수 없고 기자에게 수사권이 없는 이상 당장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막가파식 테러’인지 가려내기 어렵다. 그런데 대중매체에 실명이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나면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러려니 하는 게 세상 인심이다. 그러니 당하는 쪽이 정말 억울하다면 ‘정치적 살인’이라고 분기탱천할 만도 하다. 하나 이미 지난 정권에서 여러 차례 보아왔듯이 처음에는 결코 아니라며 길길이 뛰던 ‘힘센 인사’들도 결국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으니 어쩌랴. 세상 인심 야박하다 탓할 노릇은 아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당사자들에게는 정말 야박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실명이 거론된 게 오히려 잘 된 일이다, 그렇게 툭 털고 마음을 다잡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어차피 여권 실세 K, K라고 할 때부터 한 K는 누구고, 다른 K는 누구라는 입소문이 시중에 짜하게 돌았거늘 이제 와서 실명을 밝혔다고 노발대발 해 봐야 공연히 우세나 더 당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아, 아니라는데 뭐가 잘 된 일이냐.’ 그렇게 흥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통령의 장남이요, 막강한 동교동계 좌장이라면 억울하고 답답하더라도 과연 의혹을 살 만한 일은 없었는지, 이를테면 조폭 출신과 밥은 안 먹고 인사만 나누었지만 호가호위(狐假虎威)라고 위세를 부릴만한 권세를 빌려준 셈이 된 건 아닌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행여 그럴 소지가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의 의심을 살 만하다, 그렇게 송구해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더구나 무슨 권력형 비리 의혹이 있다고 하면 그동안 으레 ‘K K 몸통설’이 나돌았으니 차제에 이런 저런 설을 잠재울 수 있다면 그 또한 잘 된 일이 아니겠는가.

▼국민이 고개 끄덕일 수 있어야▼

검찰총장이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국회의원의 면책특권도 내재된 한계가 있다”면서 으름장을 놓았다고 하니 여권에서는 이번 일을 계기로 야당의원의 ‘무책임한 폭로’에 쐐기를 박자고 결의를 다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무엇보다 검찰총장이 앞서 목청을 높이기에는 요즘 검찰의 체면이 너무 구겨져버렸다. ‘이용호 게이트’에 검찰 지휘부가 연루된데다, 부장검사라는 사람이 사건 진정인과 만나 할 말 안 할 말 다한 것이 생생히 까발려진 판에 검찰이 서슬 퍼렇게 나선다고 씨가 먹히겠는가.

한나라당의 몇몇 강경 보수 의원들이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면 됐지 거기에 색깔을 입혀 지역정서 덕을 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역겹다. 일단 터뜨리고 보자는 식의 ‘정략적 폭로’도 역겹긴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는 것은 쥐 잡으려다 간장 독 깨는 격이다.

아무튼 K, K씨여, 더는 지난 날 얘기는 하지 마시라. 민주화 투쟁으로 고생하신 것 이제 다들 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렇네, 정말 억울하겠네’, 국민이 그렇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 길밖에 없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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