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전진우/고속도로 주유원 황씨

  • 입력 2001년 10월 19일 18시 32분


나이 마흔의 고속도로 주유원 황씨는 차에 기름을 넣을 때마다 희망을 생각하기로 한다. 온종일 기름총을 들고 종종걸음을 쳐봐야 일당은 고작 2만8800원. 그런 처지에 무슨 희망이랴 싶지만 그래도 그렇게 마음먹기로 한다. 세상살이란 고달픔 속에도 따뜻함이 있는 법. 황씨는 세상을 그렇게 바라본다.

▷신새벽에 파단을 높게 쌓아올린 소형 트럭이 주유소에 들어선다. 밤길을 내처 달려왔다는 중년의 농부에게 조금 쉬었다 가라고 말을 붙이자 기차 화통을 삶아 먹기라도 한 듯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답한다. “성, 나 되게 바빠라. 경매시간에 늦으면 책임질 거라?” 그러면서 흰 비닐봉투에 담긴 삶은 달걀을 건네준다. “서울 가면서 먹으라고 집사람이 싸준 것인디 손이 커서 되게 많이 삶았어라. 요새는 여자 세상이고 남자는 완전히 돈버는 기계랑께요. 주유하다가 출출하면 드셔라. 참, 소금은 오다가 어디서 분실했응께 알아서 하더라고 잉.” 그렇게 말하고 농부는 떠나고 황씨는 세상의 따뜻함을 읽는다.

▷그렇다고 세상에 어디 따뜻한 마음만 있던가.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미끄러져 들어오고 중후한 모습의 신사가 가득 채우라고 한다. 5만5000원이 나왔다. 신사가 영수증을 달라고 해 영수증을 끊는데 승용차가 순식간에 시동을 걸더니 쏜살같이 달아난다. 소리소리 지르며 뒤쫓아봤자 허사다. 일당의 두 배나 되는 기름값을 꼼짝없이 물어내야 할 판이다. 어느 젊은 아가씨는 재떨이를 비우라고 하고, 어떤 덩치 큰 남자손님은 주유중 담배를 꺼달라고 하자 욕설을 내뱉고 휑하니 가버린다. 하지만 황씨는 세상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따뜻한 마음이 훨씬 많다고 믿기에.

▷올해 창간 70주년을 맞은 월간 ‘신동아’ 논픽션 공모에 최우수작으로 뽑힌 황호민씨의‘고속도로 주유원의 일기’는 주유원의 눈으로 바라본 세태만상이다. 갖가지 인간군상이 보여주는 삽화들은 적게는 흐뭇하고 많게는 씁쓸하다. 그러나 ‘주유원 황씨’는 적은 흐뭇함으로 많은 씁쓸함을 감싸준다. 세상을 바라보는 황씨의 따뜻한 눈이 읽는 이들의 가슴을 덥혀줄 수 있으리라.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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