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명광고]야릇한 카피속 제품이미지 각인 '필립스 CD레코더'

  • 입력 2001년 9월 11일 19시 10분


사랑에 빠지면 세상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인다. 그녀의 곰보자국이 보조개로 보이고 목욕을 싫어하는 그이의 지저분함조차 터프함으로 변신한다. 또 매일 지나치던 거리에서 거기에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꽃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세상 온갖 것들이 그것과 관련되어 보인다. 이발사 눈엔 사람들 머리만 보이고 구두쟁이 눈에는 사람들 신발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자기 관심분야의 정보만을 받아들이는 이 현상을 학자들은 어렵게 ‘선택적 지각’이라고 한다. 우리 조상님들은 좀 더 쉽게 ‘개 눈엔 뭐만 보인다’고 했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바로 사람들의 이런 심리현상을 이용한 필립스의 CD레코더 광고다. 1891년 네덜란드의 아인트호벤에서 안톤과 제라르드 필립스 형제가 설립한 필립스는 전세계 60여개국에서 자회사와 약 24만여명의 종업원을 거리고 있다. 필립스는 콤팩트디스크(CD)를 1983년에 세계최초로 개발한 주역이기도 하다.

광고의 비주얼은 CD레코더와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전기 레인지와 작은 인형이 겹겹이 들어있는 러시아의 민속인형이다. 레인지 그림을 한번 살펴보자. 동그란 코일은 CD매니아들에겐 당연히 CD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더 압권인 것은 그 트랙마다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깨알같이 작게 노래 제목처럼 쓰인 카피. 첫 트랙의 제목은 침대시트, 그 다음은 당신 살갗의 체온, 함께 하는 밤, 흐르는 땀, 당신의 열기가 나를 죽여요, 내 모든 것은 당신의 것, 나는 당신을 위해 타올라요, 폭풍이 지나간 후… 이런 제목이 순서대로 적혀 있다. 그리고 끝에는 ‘당신의 가장 뜨거운 음악을 CD에 녹음하세요’ 라는 슬로건이 마무리를 맡는다.

광고의 생명은 새로운 아이디어다. 하지만 아이디어에 매달리다 보면 자칫 제품과의 연관성을 놓치기 쉽다. 사람들 머리 속에 광고 아이디어만 남고 제품은 사라지는 누를 범하는 것이다. 즉, 광고는 기억 속에 남겼는데 막상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데는 실패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광고는 소비자로 하여금 이 제품을 사면 뭘 할 수 있고, 뭐가 좋겠구나 하는 나름대로의 상상까지 하게 만든다. 정말 박수를 쳐주고 싶은 작품이다.

이민호(Lee&DDB 카피디렉터·amour@leed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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